인종보다 강력한 유리천장...美 여성 대통령 한번도 못나온 이유

뉴욕/윤주헌 특파원 2024. 11. 8. 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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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트럼프 시대] ‘최고 공직=남성’ 200년 역사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6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패배 승복 연설을 했다./AFP 연합뉴스

“여러분에게는 세상에 놀라운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니 절망하지 마세요. 지금은 포기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우리가 소매를 걷어붙여야 할 때입니다.”

미국 대선의 승패가 사실상 확정된 6일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자신의 모교인 워싱턴 DC의 하워드 대학에서 수백 명의 지지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지지자들은 그의 말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해리스는 그들을 바라보며 “싸움이 오래 걸릴 순 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이기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했다.

대선 투표가 끝난 지 만 하루가 지나기도 전인 이날 오후 해리스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패배한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는 “미국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은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면서 “이것이 민주주의를 군주제나 폭정과 구별한다”고도 했다. 워싱턴포스트(WP) 등은 이 같은 해리스의 발언을 두고 “트럼프가 2020년 선거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오히려 극렬 지지자들이 2021년 1월 6일 국회 의사당에 난입하도록 부추겼던 것을 상기시킨다”고 했다.

해리스는 선거 결과에 대한 패배는 받아들이지만, 자신이 추구했던 가치에 대한 싸움만큼은 양보하지 않겠다고도 했다. 그는 “자유, 기회, 공정, 모든 사람의 존엄을 위한 싸움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WP는 “이번 트럼프의 대선 승리는 미국 최고 공직에 남성만을 선출해온 관행이 이 나라가 건립된 지 200여 년이 지났음에도 깨지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썼다.

실제로 여성 지도자는 전 세계적으로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지만, 미국과 프랑스는 아직 여성 대통령을 배출한 적이 없다. 미 퓨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단 한 번이라도 여성 지도자를 배출한 나라를 집계하면 60국 정도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웨덴, 덴마크 같은 유럽 선진국과 호주, 한국이 여기에 속한다. 인도와 방글라데시에서도 여성 총리가 나왔다. 이탈리아는 조르자 멜로니 총리가 연정을 통치하고 있고, 북유럽 덴마크에선 역대 두 번째 여성 총리인 메테 프레데릭센이 집권 여당을 이끌고 있다. 남유럽은 그리스 카테리나 사켈라로풀루 대통령을 비롯해 발칸 반도의 슬로베니아·북마케도니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이 총리 외에 여성 대통령을 두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도 나미비아·콩고민주공화국·우간다는 여성 총리가 집권 중이고, 탄자니아도 여성 대통령이다.

그래픽=박상훈

반면 서구 민주주의의 대표 국가인 미국과 프랑스에선 지금까지 여성 대통령이 나오지 못했다. 2016년 대선 때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민주당 후보가 첫 여성 후보로 출마했고, 해리스는 주요 정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두 번째 여성 후보였다. 프랑스에선 지난 2007년 대선 때 사회당 후보 세골렌 루아얄이, 또 2017년과 2022년 대선에선 극우 성향 국민연합의 마린 르펜이 후보로 나와 결선 투표까지 갔지만, 각각 우파 니콜라 사르코지와 중도 에마뉘엘 마크롱에게 패배했다.

일각에선 마지막 유리 천장을 여성 정치인들이 쉽게 깨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기본적으로 수적으로 남성보다 열세이고, 따라서 인맥과 네트워크가 중요한 정치권에서 세력을 만들기 쉽지 않은 상황을 꼽는다. 가령 미국의 경우 상원의원에 진출한 여성 정치인의 비율은 25% 정도에 그친다. 하원의원도 29% 정도로 여전히 20%대를 넘지 못하는 상황이다.

제왕적 남성 리더십에 익숙한 대중이 결정적 순간엔 여성 지도자를 뽑는 것을 여전히 주저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독일 쥐트도이체자이퉁은 지난 2022년 프랑스 대선에서 여성 대선 후보들이 모두 낙선한 이유에 대해 “대통령직은 권위·단호·의연함 같은 남성적 리더십을 떠올리게 한다”며 “많은 프랑스 국민들은 여성 정치인으로부터 이 같은 면모를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여성의 정치 사회에 대한 참여가 이미 상당 부분 이뤄진 상황에서 유권자들이 ‘여성 대통령을 선출한다’는 사실만으로는 더는 가중치를 두지 않는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날 AP는 미국 12만명 이상 유권자를 대상으로 한 자체 여론조사에서 “유권자 10명 중 1명 정도만이 해리스가 당선되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된다는 사실을 투표할 때 가장 중요한 이유로 고려했다”면서 “4분의 1은 (여성 대통령 선출이) 중요한 동기는 맞지만 가장 중요하지는 않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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