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혼자 부는 오보에

2024. 11. 8.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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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계기로
K문학 열풍 詩로도 이어질 조짐
번역 출간 앞둔 이성복의 시집 등
세계가 함께 즐기는 한글문학 기대

한동안 오보에 음악에 빠져 있었다. 오보에 연주를 독학하는 한 친구 때문이다. 이 친구는 의대 4학년 마취과 실습 중에 급성 뇌수막염으로 쓰러졌다. 2년간의 코마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했지만 몸 상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의대 졸업 후 소년원 의사로 장기간 근무를 하고 두 번째 직장을 다니는 중에 오보에에 매료되었다. 새벽 5시에 전동 휠체어로 출근하여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자 오보에를 연주한다고 했다.

‘오보에’라는 이름은 ‘음이 높은 나무 피리’라는 뜻의 프랑스어 오부아(hautbois)에서 나왔다고 한다. 오보에 소리가 높고 커서 친구는 새벽의 빈 건물에서 연주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친구가 주로 연주하는 곡은 영화 ‘미션’에서의 ‘가브리엘의 오보에’와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다. 타 도시에 근무하는 친구의 연주를 들어주는 마음으로, 오보에 연주곡들을 자주 듣게 된 것이다.
천수호 시인
중고등학교 때 이 친구의 꿈은 등대지기였다. 등대지기를 하면서 자기 취향의 책을 실컷 읽고 싶었다고 한다. 마치 그 꿈이 절반은 이루어지기라도 한 듯이 친구는 등대지기처럼 늘 혼자다. 불편한 몸으로 업무를 마치고 오면 번역 작업에 몰두하거나 책을 읽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소통에 있어서 그 주변은 막막한 바다와 다름없을 것이다. 등대지기라니! 하필 꿈이 스스로 외로움을 자처한 것이라니.

M L 스테드먼의 소설 ‘바다 사이 등대’의 주인공인 톰 셔본이 떠오른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톰은 전쟁 체험에서의 죄책감 때문에 등대지기를 자처한다. 자신의 전쟁 기억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등대지기였다. 이 소설은 ‘파도가 지나간 자리’라는 제목의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영화에서는 바다로 둘러싸인 무인도의 등대 불빛이 검은 수면을 훑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그 장면은 그가 얼마나 유폐된 삶의 현장에 있는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등대지기에 대한 생각과 겹쳐서 듣는 오보에 소리는 아득하고 막막하다. 친구가 주로 연주한다는 ‘가브리엘의 오보에’는 영화 ‘미션’의 가브리엘 신부가 원주민들 앞에서 불던 곡이다. 원주민들이 겨눈 화살 앞에서 오보에를 부는 장면은 이 영화의 명장면이다. 그의 진심이 오보에 소리로 원주민들에게 전달되는 순간이었다.

시를 쓰는 나는 가끔 우리의 시(詩)가 ‘친구가 홀로 연주하는 오보에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국내 독자들에게 감흥을 주고 또 즐겨 읽히는 시들조차 제대로 번역되지 못한다고 생각한 연유다. 비교적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시인들은 해외 시인들과 교류하고, 또 더러는 시집이 해외에서 번역 출간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도 활발하진 않았다. 한글의 리듬이나 독창적인 언어의 맛을 살려서 소개할 수 있는 번역가도 드물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가운데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참으로 반가운 물꼬인 셈이다. 이 소식과 더불어 K문학의 열풍이 시로 번질 조짐을 느낀다. 이성복 시인의 시집 ‘그 여름의 끝’이 내년에 영어로 번역된다는 소식이다. 미국 최고 권위의 대형 문학 전문 출판사인 ‘크노프’에서 출간될 예정이며, 김혜순 시인의 ‘죽음의 자서전’은 독일어로 번역 중이어서 내년 독일의 대형 출판사인 ‘피셔’에서 출간된다고 한다.

또한 이달 14일에는 이성복 시인의 창작시론집인 ‘무한화서’가 펭귄 북스에서 영문판으로 출간된다. 이 책은 작년에 미국의 작은 전문 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된 적이 있는데 빠른 속도로 매진되어 네 차례나 급히 재출간되었다. 서정적 통찰이 담긴 470편의 시론이 그 자체로 시처럼 읽혀서, 높은 수요를 예상한다는 펭귄 출판사의 소개 글만 읽어도 기쁘다. 한국의 창작 시론이 해외 작가들에게 선물로 전해진다는 것은 한국 시 세계화의 중요한 출발이기도 하다. 이제 더 이상 우리의 시(詩)는 혼자 부는 오보에 연주가 아니다. 그렇다면 친구의 오보에 연주도 갖춘 공간에서 들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생각이 이렇게 굴러가는 것만으로도 환해진다.

천수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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