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추억의 힘

조규익 숭실대 명예교수 2024. 11. 8.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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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 좋은 가을날 하교 후 ‘낚시광’ 담임 선생님과 바닷가에 나가 망둥이 잡던 일, 한밤중 동네 형들과 참외밭에서 서리하던 일, 아버지 따라 간 장터에서 짜장면 먹던 일, 이웃 누나와 옆 동네 청년 사이의 연애편지를 배달하며 몰래 훔쳐보던 일, 아침저녁 누렁소를 바닷가 백사장 풀밭에 매어 놓았다가 끌어오던 일 등. 고향 친구들의 모임에선 추억담이 끊이지 않는다. 엊그제 일도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인데 좋든 궂든 젖 뗄 무렵부터 국민학교 졸업 때까지 경험한 일들은 또렷이 기억에 남아 있으니, 신기한 일 아닌가.

이와 달리 사회 친구들의 모임에선 현실적인 이야기들이 오간다. 고향을 달리하는 이들과 나누는 건 ‘지금의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옛날’은 채색된 시간대, ‘지금’은 칙칙하고 껄끄러운 그것이다. 옛 추억은 알록달록 색깔을 달리하며 익어온 것들이나, 지금의 경험들은 사실성과 합리성이 중시되는, 각박한 현실의 소산이다.

친목 도모라는 목적 외에 고향 친구들의 만남과 사회 친구들의 만남은 다르다. 전자는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추억과 정으로, 후자는 살아가며 이루어진 현실적 친밀감의 끈으로 각각 맺어진다. 두 관계 모두 신뢰와 정서적 유대감을 바탕으로 지속됨은 말할 필요도 없다. 돈독한 유대는 세상이란 바다를 항해하는 힘이다. 개성이나 정치적 성향 등의 다름으로 툭탁거리며 모임이 깨질 듯하면서도 그럭저럭 유지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그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추억을 ‘망각된 미래’ 혹은 ‘시간을 초월하는 보물’이라지만, ‘함께 한’ 시간성과 장소성의 융합 개념으로 정의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망둥이를 낚으며 선생님과 나눈 이야기들, 깜깜한 밤 밭고랑을 포복하며 참외를 깨물던 형들과의 유대감, 장터 짜장면의 맛을 통해 짐작해 본 바깥 세계 등은 ‘시골 아이들’을 오늘의 우리로 키워 준 내면적 양식이었다. 견해의 차이로 첨예하게 대립할 때마다 누군가가 고향의 추억담을 꺼내고, 그 말에 서로 맞장구를 치는 동안 ‘얼음’이 스르르 녹아내리며 하나가 되지 않는가. 그러니 분명 추억의 힘은 세다고 할 수밖에 없다.

조규익 숭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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