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창덕궁 우물 속에서 발굴됐던 ‘화란 나르당의 천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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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4년에서 1849년 사이에 쓰여진 ‘궁궐지(宮闕志)’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 궁궐의 명칭과 연혁을 적어 놓은 ‘궁궐의 교과서’라 할 만한 책이지요. 여기에는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세조 때 종신(宗臣)에게 명해 터를 잡아 우물을 파게 했는데 그 뒤에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어 두 우물만 남았다. 숙종 16년(1690) 경오(庚午)에 그 고적(古跡)을 애석히 여겨 우물 둘만이라도 보수하라고 명하고 이어 그 곁에 비를 세웠다. 숙종이 적은 ‘사정기(四井記)’에 이르기를, 우리 세조대왕께서는… 첫 번째 우물 이름을 마니(摩尼)라 하고 두 번째 우물은 파려(王+皮, 王+黎), 세 번째는 유리(琉璃), 네 번째는 옥정(玉井)이라 했다.
‘마니’ ‘파려’ ‘유리’ ‘옥정’이란 이름을 한번 소리 내 발음해 보시지요.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마니’란 보주(寶珠), 즉 ‘보배로운 구슬’이란 뜻이고, ‘파려’는 수정(水晶)을 말합니다. 거기에 유리와 옥까지. 그곳에서 두레박으로 떠올리는 물은, 그야말로 방울 방울이 보석 결정체처럼 느껴지는 천연수가 아니었겠습니까. ‘왕의 우물’은 이름조차 남달랐습니다.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하고 옥좌에 오른 사람의 감수성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좀 소름이 끼치기도 합니다만 말이죠.
그런데 여러 차례 전란을 겪었다는 것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말합니다. 우물 네 개 중에서 두 개가 없어졌다는 것은, 두 곳이 흙으로 완전히 메워졌다는 얘깁니다. 나머지 두 곳은 물줄기만 간신히 남았다는 얘기겠지요. 그런데 숙종 때 보수했다는 두 곳개의 우물 역시 언제부터인가 그 자취를 남기지 않게 됐습니다.
이 우물들은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발굴 조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내게 됐습니다. 2000년대 중반 창덕궁 후원의 연못인 부용지(芙蓉池) 근처에서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은 관람로 정비 공사를 벌이게 됐고, 그에 앞서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현 국립문화재연구원)가 이곳을 미리 발굴하게 됐던 것입니다. 1826~27년의 창덕궁 지도인 ‘동궐도’에 나타난 부용지 북서쪽 모서리에는 지금 ‘사정기 비각’이라는 이름의 비각이 있습니다. 사정기? 그렇습니다. 숙종 임금이 ‘네 개의 우물’ 이야기를 썼던 그 사정기입니다. 그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이 있는 자립니다.
이 비각 북쪽 지점에서, 자, 우물 두 개가 그 모습을 선연히 드러냈던 겁니다. 이 우물은 2008년 12월 23일 언론에 공개됐습니다.
서로 5m 거리를 두고 거의 완전한 상태로 발견된 것이죠. 두 개 모두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만든 팔각형 모양이며, 시기가 앞선 우물은 지름 164㎝, 깊이 175㎝, 다른 우물은 지름 85㎝, 깊이 244㎝의 크기였습니다. 시기가 앞선 우물이 바로 세조 때 ‘마노’ ‘파려’ ‘유리’ ‘옥정’ 중의 하나고, 시기가 늦은 우물은 숙종 때 보수한 두 개 우물 중 하나로 생각됩니다. 숙종은 왜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요? 어느 우물이 ‘마노’ ‘파려’ ‘유리’ ‘옥정’인지 이 무렵에는 이미 알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저 사진을 좀 보십시오. 참으로, 500여년 동안 면면히 이어진 왕실의 옛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는 듯한 모습 아닙니까? 땅을 파보기 전에는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물이 나왔던 그 해만 해도 땅거죽 한 꺼풀만 걷어낸 서울은 정말 밑바닥에서 놀라운 옛 흔적들을 드러냈습니다. 경복궁의 조선 초기 건물터와 궁궐 담장터, 세종로의 육조 거리 흔적과 전찻길, 숭례문 아래 조선시대 박석을 깐 도로 흔적과 가옥터, 그리고 동대문운동장 축구장 아래에 고스란히 보존돼 있던 폼페이 유적 같은 이간수문(二間水門)… 만약 당신이 서울에 사신다면, 그리고 옛 도성과 가까운 곳이라면,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그곳 땅 밑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도대체 저 우물은 언제 땅 속에 묻혀 버렸던 것일까요?
담당자인 학예연구관에게 물어 봤습니다. “글쎄 저… 그게 말이죠. 참 난감한 일인데, 도대체 그 어디에도 기록이 없는 겁니다. 아는 사람도 없고요.” 이럴 수가. 누군가 일부러 묻어버린 것이 뻔한데(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적으로 흙에 덮여버릴 만한 규모는 아니므로) 아무도 그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요?
그런데 여기서 그 연구관은 매우 뜻밖의 말을 했습니다.
“시기가 늦은 우물에서 좀 색다른 유물이 나왔어요.”
“네? 그게 뭡니까??”
그것은 바로…
바로 저것이었습니다. 사진 속의 저 여인(혜은이)이 손에 들고 있는 바로 저것.
저 광고가 나온 1970년대도 이미 옛날이 돼 버린 것이, 길가는 젊은 사람 붙잡고 ‘화란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묻는다면 과연 얼마나 대답할 것인가요. 화란(和蘭)은 홀랜드, 즉 네덜란드의 음역어이고 ‘나르당’은 네덜란드의 도시이자 그곳에 있던 향료 제조사의 이름이었습니다.
“칠성사이다 병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아마도 1960년대까지는 우물이 땅 위로 드러나 있었고, 그 후에 파묻힌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칠성사이다는 도대체 어느 시대의 ‘문화유산’인 것일까요. 1960년쯤 나왔다고 그냥 기사에 쓰면 되는 걸까요? 칠성사이다가 세상에 나온 것은 1960년대보다도 훨씬 앞선 시기였습니다.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9월, 아마도 서울수복 직후로 보이는데, 일곱 명의 동업자가 서울에 ‘동방청량음료’라는 회사를 세웠답니다. 일곱 명의 성씨가 다 달라 ‘칠성(七姓)’이란 이름이 붙여졌고, 그 뒤에 ‘칠성(七星)’으로 한자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물론 사이다의 역사는 좀 더 오래됐습니다. 일제 때는 금강사이다와 합동사이다가 있었고, 해방 후에는 서울사이다, 삼성사이다, 스타사이다 등이 각축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창덕궁 후원의 우물들은 최소한 1950년대 초까지는 멀쩡히 땅 위에 드러나 있었던 것이고, 누군가 그곳 근처에서 사이다를 마시고 병을 던져 넣기까지 했던 것이 됩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창덕궁 후원은 일반인 관람객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던 곳이고, 돗자리를 깔아 놓고 도시락을 먹는 일도 흔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곳을 ‘비원’이라 불렀지요. 한동안 출입이 금지됐다가 하루에 몇 회씩 단체관람 형식으로 다시 개방했습니다. 앉아서 사이다를 마시는 일 같은 건 어렵게 된 상황이지요.
물론 창덕궁 후원 근처에는 보안 관련 시설도 좀 있었습니다. 거기서 한 일이 의도적으로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적의 멸실’치고는 너무나 시기가 늦다는 점이, 그리고 누가 언제 무슨 이유로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몰랐다는 점에서 좀 당혹스런 일입니다.
어쨌든 사이다 병이라는 단서 하나가 사라진 유적의 연대를 측정하는 단서가 된 셈이죠. 지금 우리가 무심히 쓰고 있는 생활용품도 세월이 흐르고 흘러 희귀성이 높아지고 문화적 가치가 재평가된다면, 언젠가는 ‘문화유산’이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먼 훗날에는 우리도 ‘문화유산 속에서 살고 문화유산을 사용하던 옛 사람들’이 된다는 얘깁니다.
그 무렵 폐허가 돼 버린 옛 동대문운동장의 발굴 현장에 취재갔을 때, 물론 관심을 가져야 했을 곳은 그 밑에서 나온 조선시대의 유적들이었습니다만, 제 가슴을 설레게 했던 것은 엉뚱하게도 사라진 운동장 자리 한켠에 몇 개 간신히 남아 있는 그 옛날의 라이트 시설들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그 때는 그것이 그렇게도 까마득히 높아 보였건만. 그걸 환하게 킨 채 벌어졌던 ‘나이트 게임’은 또 얼마나 장려했던가요.
하지만 그런 추억들을 서둘러 밀어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려는 ‘변신 강박증’이 판친다면, 21세기 초 우리의 시대는 고작 역사책에 몇 줄 남겨질 ‘경제불황’과 ‘국회 난투극’ 정도로만 기억될지도 모릅니다. 500년 전의 유적만큼이나 소중한 것이 바로 우리들이 살아 온 그 터전이고, 기억이고, 추억이며, 삶 그 자체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글은 칠성사이다 측으로부터 아무런 지원을 받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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