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눈 속 거대한 판타지 공연에 초대받았다면…[그림책]
폭설이 내린다. 나는 따뜻한 방 안에서 친구와 아빠의 ‘나비 도감’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노랑, 빨강, 연한 파랑, 하양 나비에 마음을 뺏긴다. 실수로 한 장이 쭉 찢어진다. 아빠가 가장 아끼는 책인데. 나는 잠시 밖으로 나와 스키를 타고 어디론가 간다. 예쁜 나비, 찢어진 책, 아빠…. 생각에 잠겨 쭉쭉 산을 타던 나는 그만 푹 파인 구덩이 안으로 빠진다.
아라이 료지가 쓰고 그린 <눈 극장>은 짧은 판타지 그림책이다. 모든 판타지가 그렇듯, 모험은 구덩이에 빠지면서 시작된다. 나는 구덩이에서 아주 작은 ‘눈 극장’을 발견한다. 갑자기 떨어진 나 때문에 놀랐는지, 손가락만 한 눈사람이 무대 밖으로 튕겨 나왔다. 나는 눈사람을 제자리에 올려준다. 눈사람들은 나를 눈 극장의 오늘 공연에 초대한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이번엔 거대한 눈 극장이 앞에 있다. 발레리나와 광대 눈사람들이 등장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많은 눈사람이 올라와 무대를 꽉 채우지만, 여전히 조용하다. 무대 위 거대한 ‘눈 팽이’가 돌아간다. 신이 난 나는 무대 위로 올라가 함께 노래를 부른다. “돌아라. 돌아라. 눈 팽이야.”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린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눈 사이로 나비들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빠가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집에서 코코아를 마시며 눈 팽이를 떠올린다.
조용한 그림책이다. 주인공은 눈 내리는 날 집에 있다가, 잠깐의 모험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실수로 책을 찢긴 했지만 혼날까봐 크게 불안해하진 않고, 구덩이에 빠지는 것도 딱히 큰 고난은 아니다. 간단한 서사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그림들이다. 특히 공연이 펼쳐지는 중반부터는 모든 장이 독립된 작품 같다.
21세기 일본 그림책의 거장으로 불리는 저자의 내공이 느껴진다.
김한솔 기자 hans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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