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휘의 시네필] 살기 위해 죽는 삶, 지구적 관점으로 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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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 넥스트 도어'(2024)로 유럽을 떠나 처음으로 미국에서 (그리고 드물게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를 작업했지만,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개성은 퇴색함 없이 여전하다.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여성들은 늘 죽음과 밀접해있고 불운과 비극적 사건을 겪으면서 통념을 넘어 다른 각도에서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통찰의 시선을 갖게 되는데, 보스니아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전장을 돌아다니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시로 드나든 마사 역시 그러한 인물의 계보에 한 줄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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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룸 넥스트 도어’(2024)로 유럽을 떠나 처음으로 미국에서 (그리고 드물게 원작 소설이 있는) 영화를 작업했지만,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개성은 퇴색함 없이 여전하다.
‘페인 앤 글로리’(2019)와 ‘패러렐 마더스’(2021)에 이어 어느덧 일흔을 넘긴 노장의 작품에는 갈수록 점점 죽음과 불안, 회한과 근심의 그림자가 짙어져가지만, 의상과 인테리어의 현란한 색감과 모던한 디자인이 자아내는 시각적 풍부함, 그리고 반복되는 특유의 멜로드라마적 구도와 모티브는 바다 건너서도 알모도바르가 여전히 본인의 색채를 잊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잉그리드(줄리안 무어)는 한동안 연락이 끊긴 종군기자 친구 마사(틸다 스윈튼)의 병환이 위중함을 알게 되고 문병을 간다. 영화는 말기 암환자로 투병 중인 마사가 몰래 자신의 안락사를 계획하고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낼 동무로 잉그리드를 끌어들이는 과정을 다루면서 틈틈이 두 사람의 개인사를 들추어낸다. 그런데 레토릭이 다분히 알모도바르답다. 준비되지 않은 채 어머니가 돼 딸 미셸에게 버림받고 차가운 애증의 대상이 된 마사의 처지는 ‘하이 힐’(1991)과 ‘귀향’(2006) ‘줄리에타’(2016)의 망가진 모녀 관계를, 사회적 시선의 감시를 피해 금기를 범하면서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고 충실하려는 소수자에 대한 연민과 관능에 대한 이해는 ‘그녀에게’(2002)와 ‘나쁜 교육’(2004)을 떠올리게 한다.
뜨거운 감자일 법한 안락사는 영화의 중심 소재가 아니라,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위해 동원된 도구에 가깝다. 동성애 불륜 신성모독 페티시즘…. 경력 내내 온갖 자극적인 소재를 끌어들여가며 법과 시스템, 정상적 사회규범의 부르주아적 위선을 비꼬고 모욕해 온 이 무정부적 허무주의자의 괴팍한 이면에는 관객에게 화두를 던지고 풍자를 통해 진정으로 인간적인 삶, 자유와 행복이 무엇인가를 되묻고 깨닫게 하려는 윤리적 열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여성들은 늘 죽음과 밀접해있고 불운과 비극적 사건을 겪으면서 통념을 넘어 다른 각도에서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통찰의 시선을 갖게 되는데, 보스니아를 비롯한 세계 각지의 전장을 돌아다니며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시로 드나든 마사 역시 그러한 인물의 계보에 한 줄을 보탠다.
알모도바르의 영화에서 모성(母性)은 언제나 중요한 테마이다. 모녀는 서로를 사랑함과 동시에 증오하며, 떠나간 딸은 언젠가 자신의 근원, 돌아와야 할 고향이자 상징적 자궁인 어머니의 자리로 돌아와 다음 세대의 어머니가 됨으로써 삶은 계승되고 역사가 된다. ‘패러렐 마더스’에서 두 여성의 미시적인 개인사가 집단의 거시적 역사와 분리되지 않음을 이야기했던 감독은 ‘룸 넥스트 도어’에선 암으로 죽어가는 마사의 처지를 기후변화로 종말을 예감케 하는 지구 환경이라는 대지모(大地母), 또 다른 ‘어머니’의 상황과 대응시켜 전 지구적 차원으로 비약시키며 그 의미를 강화한다.
파국을 목전에 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공포에 굴복해 무기력해지지 않고, 마사가 그랬듯 가능한 유쾌하게, 가치 있게 남아있는 나날을 살아내는 일일 것이다. 스피노자도 ’에티카’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자유인은 죽음 같은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으며, 그의 지혜는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숙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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