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인권위’에서 사라진 것 [세상읽기]

한겨레 2024. 11. 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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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 전원회의실에서 인권위 전원위원회가 열려 안창호 위원장이 발언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김인아 | 한양대 교수(직업환경의학)

전세계가 뉴스로 가득 차 있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우는 도널드 트럼프가 새 대통령으로 돌아왔다. 전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고, 한국도 남북 간 국지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우리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국민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을지 궁금하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국민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두가 뉴스에 주목하고 있는 요즘이다.

쏟아지는 뉴스 속에 그냥 흘려보내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소식들도 있다. 이태원 참사 2주기가 지났다. 세월호 민간 잠수사 한분이 이라크 공사 현장에서 일하다가 산업재해로 숨졌다는 소식도 뒤늦게 전해졌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를 쓰게 된 계기가 2009년 1월, 철거 현장이었던 남일당 건물에서 발생한 ‘용산 참사’를 지켜보면서였다는 과거의 인터뷰가 재소환되었고, 고공농성 300일을 맞은 한국옵티칼하이테크 구미 공장에는 연대버스가 갔다는 소식도 있었다. 희망버스가 한진중공업의 김진숙에게 당도했던 것처럼, 연대버스가 노동자들에게 당도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쓸어 가는 뉴스들이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각자의 자리에서 뚜벅뚜벅 걸음을 내딛는다.

한강이 글로 고통스럽게 직면하게 한 광주에서처럼, 여러 사람의 고통과 희생이 지금의 한국 사회를 만들고 지탱해온 것일 수도 있다. 이 고통과 괴로움에 공감하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각자의 역할을 찾았던 사람들이 한국 사회를 그나마 살 만하게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고통과 괴로움을 듣고 살펴, 해결을 모색하고 인권을 보호할 수 있는 조치가 무엇일지 고민해야 하는 대표적 기구인 국가인권위원회 사무총장이 “부끄럽고 참혹해 얼굴을 들 수 없다”며 사임했다. 2001년 설치 이후 정권의 성향에 따라 부침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래도 꾸준하게 한국 사회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많은 일을 해온 곳이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사무총장 사의 표명 직후 그동안 전원 합의제로 운영하던 인권위 소위원회의 관행을 폐기했다는 뉴스가 이어졌다. 이전에는 3명으로 구성된 소위원회에서 의견이 다른 경우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논의를 하거나 조정을 하도록 애를 써왔다고 한다. 도저히 합의가 어려운 상황이면 전원위원회에 상정해 비상임위원들과 함께 논의를 하는 방식으로 진행을 했다. 그런데 이제는 4명의 소위원회에서 3명 이상의 찬성을 얻지 못하면 해당 진정을 기각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만장일치 합의제는 인권 보호가 최우선이기 때문에 최대한 신중하게 논의하고 검토하자는 취지였을 것이다. 법적 판단을 하는 게 아니라 인권 측면에서 권고하거나 의견을 표명하는 기구이기 때문에 좀 더 신중하게 법률이 보호하지 못하는 영역까지 고려하여 논의를 해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합의제 폐기에 법리적 잘못은 없으니 괜찮다는 안창호 인권위원장의 반박이 인권보호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민주주의에서의 일반적인 결정 방식이 다수결이기는 하나 극단적 양극화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은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인정하는 상호 관용과 이해, 그리고 제도적 권리를 행사할 때 신중함을 잃지 않는 자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것은 극단적 양극화로 이 규범을 침식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는 위원회의 목적을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그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고 민주적 기본질서의 확립에 이바지함”으로 명시하고 있는 만큼, 지금까지의 인권위원회는 이러한 민주주의의 규범을 최대한 따르는 논의 구조였다고 볼 수 있다.

내가 알고 있는 인권위원회는 큰 사건과 뉴스 속에 파묻힐 수도 있는 일들을 세심하게 살펴온 곳이고, 탄광의 카나리아처럼 우리 사회의 누군가 위기에 있는 그 순간, 예민함을 발휘하는 곳이었다. 현재 인권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관심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너무 힘들고 느려도, 뒤로 돌아가는 것은 찰나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여러 곳에서 목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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