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에 차린 식탁, 커피로 보는 점…앙카라에서 마주한 것들

박미향 기자 2024. 11. 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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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의 미향취향
튀르키예 앙카라 여행
튀르키예 커피는 독특한 추출 방식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박미향 기자

튀르키예는 국토 전체가 유적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수많은 이질적인 문화가 교차하며 문명이 꽃핀 땅이다. 역사적 자산이 넘쳐나는 나라, 튀르키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유적지만도 20곳이 넘는다. 이런 이유로 역사 여행하기에 이만한 나라도 없다. 하지만 튀르키예 여행에 유적지 관광만 있는 건 아니다. 독특한 ‘경험’은 여행의 짙은 여운을 남긴다. 튀르키예에는 ‘목욕’과 ‘커피 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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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뫼뉘 거리 풍경. 박미향 기자
하마뫼뉘 거리 풍경. 박미향 기자

지난 9월26일(현지시각)에 도착한 수도 앙카라. 대표적인 앙카라 여행지로는 ‘앙카라 칼레시’(Ankara Kalesi, 앙카라 성채)와 ‘하마뫼뉘’(Hamamönü, 목욕탕 구역)가 꼽힌다. 12세기에 세워진 ‘아슬란하네 자미’(아슬란하네 모스크)와 고풍스러운 골목, 웅장한 요새를 품고 있는 앙카라 칼레시는 수도의 대표적인 역사 유적지다. 앙카라 중앙에 있는 ‘하마뫼뉘’는 우리로 치면 인사동 같은 마을이다. 오스만제국과 1923년에 수립된 튀르키예공화국 초기 주거 양식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골목마다 복원된 옛집과 상점들, 커피집이 넘쳐난다.

이날 앙카라 여행 안내자로 나선 관광가이드 아이빌라 괵수는 유서 깊은 목욕탕 ‘타리히 카라자베이 하마므’를 제일 먼저 소개했다. ‘목욕탕 이야기’도 덧붙였다. “오스만제국 시절 여성들은 밖으로 거의 나올 수 없었죠. 그러니, 결혼을 앞둔 신부가 ‘신부목욕’을 하기 위해서 집밖으로 나오는 일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어요.” ‘신부목욕’은 결혼 전 신부가 친구들과 하는 일종의 파티 같은 행사였다.

하마뫼뉘 거리에 있는 목욕탕 ‘타리히 카라자베이 하마므’. 박미향 기자
하마뫼뉘 거리에 있는 목욕탕 ‘타리히 카라자베이 하마므’ 남자 구역. 박미향 기자

그의 안내에 따라 목욕탕 여성 구역에 들어갔다. 실내는 어둑했다. 커다란 저택의 거실 같은 너른 공간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 큰 테이블이 있었다. 테이블에서 위로 시선을 옮기자 각진 모양의 작은 창이 보였다. 거기서 햇볕이 쏟아졌다. 공간 가장자리에는 여러 개의 방도 있었다. 탈의실이다. 한쪽에 작은 문도 보였다. 목욕실로 들어가는 문이다. 마치 ‘목욕은 비밀스러운 일’이라고 하는 듯 보였다. 그 문을 열고 들어서자 독특한 욕실 구조가 한눈에 들어왔다. 온통 순백색의 너른 공간이 펼쳐졌다. 음침한 지옥에서 환한 천국으로 ‘순간 이동’한 듯했다. 벗은 천사들이 이리저리 나뉜 구획 한쪽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옷을 걸치지 않은 인간은 천사와 다를 봐 없다. 목욕실을 빠져나오자 괵수가 말했다. “여기서는 목욕만 하지 않아요.” ‘신부목욕’의 전통이 지금도 이어진다고 했다.

하마뫼뉘 거리에 있는 목욕탕 ‘타리히 카라자베이 하마므’의 인스타그램 화면 갈무리.
하마뫼뉘 거리에 있는 목욕탕 ‘타리히 카라자베이 하마므’의 인스타그램 화면 갈무리.

주인은 자랑스럽게 인스타그램을 들이밀었다. 어둑한 목욕탕이 화려한 파티장으로 변신한 화면에 감탄하고야 말았다. 아치형으로 장식한 화려한 의자엔 아름다운 신부가 앉아있었고, 친구들은 장미꽃잎을 뿌리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쇼에서나 볼 법한 복장을 한 여성들이 춤을 추기도 하고, 서로 손잡고 원을 만들어 돌기도 했다. 목욕탕에 차려진 식탁에 ‘미쉐린 가이드’ 레스토랑 버금가는 먹거리가 차려져 있었다. 신랑이 함께한 커플도 있었다.

하마뫼뉘 거리에 있는 목욕탕 ‘타리히 카라자베이 하마므’의 인스타그램 화면 갈무리.
하마뫼뉘 거리에 있는 목욕탕 ‘타리히 카라자베이 하마므’의 인스타그램 화면 갈무리.

한국을 좋아한다는 주인이 목욕탕을 이용한 이들의 단체 사진도 보여줬다. 어째 낯이 익다. 한국인들이었다. “목욕 체험한 한국인들이 다 좋아했어요. 다시 보고 싶어지네요. 만나면 안부 전해주세요.” 정이 넘치는 튀르키예 사람들의 심성이 가슴에 와 닿았다. 흥겨운 튀르키예 사람들의 일상 한쪽을 염탐한 짧은 시간은 그들을 이해하는 데 요긴하게 쓰였다. 여행은 결국 다른 땅에 사는 이의 삶에 공감하고 친구로, 가족으로 삼는 게 아닐까.

마을 길에선 활달한 10대와 점잖은 노인들을 만났다. 그들 사이로 개들이 게으르게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짖지도 않는 개들은 이 마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보였다. 신은 본래 땅에 내려와 있는 법이다. 우리가 짐작도 할 수 없는 가면을 쓴 채로 말이다.

괵수가 한 집을 지목했다. “이 집은 지하실이 있어요. 밖으로 난 지하실 창이 보이죠. 이런 집은 부자예요. 옛날 냉장고가 없던 시절, 부자들은 식품을 지하실에 보관했죠. 냉장고 구실을 한 거예요.”

하마뫼뉘 거리 풍경. 박미향 기자
하마뫼뉘 거리 풍경. 박미향 기자
하마뫼뉘 거리 풍경. 박미향 기자

골목 한쪽에서 고소한 향이 달려들었다. 커피 향이었다. 튀르키예가 자랑하는 먹거리에 ‘커피’가 있다. 커피는 튀르키예인들에게 ‘솔(영혼) 푸드’다. 이 나라 커피는 독특한 추출 방식 때문에 ‘튀르크(터키시) 커피’라는 장르가 생길 정도로 유명하다. 원두 가루를 추출 도구에 넣은 후 뜨거운 물을 부으면서 천천히 우려내는 방식이 아니다. 원두 가루와 설탕, 물을 한꺼번에 섞은 다음 추출 도구 ‘제즈베’(cezve)나 ‘이브릭’(ibrik)에 넣고 끓이는 방식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추출 기구는 뚜껑이 없는 ‘제즈베’다. 뜨거운 모래 위에 ‘제즈베’를 올려 끓인다.

커피 추출 도구 제스베를 활용해 커피를 끓이고 있는 커피집 ‘타리히 하마뫼뉘 카흐베지시’의 주인. 박미향 기자
커피집 ‘타리히 하마뫼뉘 카흐베지시’의 주인. 박미향 기자

커피집 ‘타리히 하마뫼뉘 카흐베지시’(Tarihi Hamamönü Kahvecisi)로 향했다. 따끈한 모래 위에 여러 개의 제즈베가 춤추고 있었다. 커피가 오븐 안에서 부풀어 오르는 빵처럼 끓어오르자 주인은 이내 거품을 가라앉혔다. 이 과정이 여러 차례 반복됐다.

튀르키예에 독특한 커피 문화가 형성된 데는 이슬람 문화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튀르키예 땅에 커피가 들어온 때는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제국의 최전성기인 16세기였다. 1554년엔 오스만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커피 상점 ‘카페하네’(‘커피하우스’란 뜻)가 생겼다. 시리아인인 하킴과 샴스가 차린 ‘카페하네’는 커피 대중화의 견인차 노릇을 했다. 음주가 금지된 나라에서 ‘카페하네’는 사람들이 커피를 매개체 삼아 소통하는 장소가 됐다. 다만 당시는 남성들만 출입이 가능했다. 여성들은 ‘신부목욕’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이 주로 목욕탕에서 모임을 가졌다.

신비주의 이슬람 종파인 수피즘의 수도자 수피가 잡념을 몰아내고 수행에 정진하기 위해 마신 음료도 커피다. 16세기 후반 이슬람법 기준에 부합하다는 일부 학자들의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카페하네’를 중심으로 한 커피 문화는 종종 탄압받았다. ‘정신에 영향을 미치기에 술과 다름없다’, ‘카페하네는 풍기문란 장소다’ 등 율법학자들의 엄격한 판단이 작동한 것이다. 위정자들은 이를 명분 삼아 카페를 탄압했다. 심지어 1633년엔 ‘커피금지령’도 선포됐다. 이를 어기는 이는 사형에 처했다. 하지만 기실 속내는 정치·사회 문제의 토론장이 된 ‘카페하네’의 역할이 눈엣가시였던 것. 이런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있는 튀르키예 커피는 단순히 마실 거리를 넘어서는 사회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커피집 ‘타리히 하마뫼뉘 카흐베지시’. 박미향 기자
튀르키예 사람들이 즐기는 ‘커피 점’. 박미향 기자

탄압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다 보니 ‘커피 점’도 생겨났나 보다. 이날 ‘타리히 하마뫼뉘 카흐베지시’에서 커피를 마신 여행객 모두는 괵수의 ‘커피 점’ 풀이에 귀 기울였다. 방식은 이렇다. 커피를 다 마신 후 잔을 뒤집는다. 몇 분 지나 다시 뒤집으면 잔 안에 커피 가루로 만들어진 문양이 보인다. 문양을 보고 점을 치는 것이다. 괵수는 “튀르키예 사람들은 많이 보는데, 한국 사람도 점 좋아한다고 안다”고 했다. “해석이 중요한데, 다양한 해석 자료나 정보, 유명한 점쟁이 의견 등이 온라인에 다 있습니다.” 관광가이드인데 마치 유명 점술가처럼 그의 ‘커피 점’은 용했다. “원이네요, 이건 별 모양이군요. 돼지도 보여요.” 여행객들은 그가 진단한 모양이 그저 신기했다. “당신은 부모를 한동안 돌봐야하니, 참고 인내해야합니다” “당신은 남자가 많아요” 등 한동안 이어진 여러 사람의 미래가 모두를 활짝 웃게 했다. 커피가 서로의 미래마저도 나누는 매개체가 된 것이다. 앙카라의 시간은 커피 향만큼 진하게 널리 퍼졌다.

하마뫼뉘 거리 풍경.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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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카라(튀르키예)/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참고 서적 ‘커피 세계사’(황소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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