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물질 맡고 만지며…” 반도체 노동자 희귀암, 힘겨운 산재 인정
ㄱ(42)씨는 ‘반도체 노동자’다. 2000년 11월, 고등학교를 졸업한 ㄱ씨의 첫 회사는 ‘현대 반도체’였다. 2004년부터는 사명을 바꾼 ‘하이닉스 반도체(현 SK키파운드리)’ 보수 담당 엔지니어로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해 반도체 사업이 분사되고 인수되고, 반도체 사업의 불황과 활황이 교차하던 20년 동안 ㄱ씨는 그 자리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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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씨는 증착 공정(반도체 소자의 표면에 다양한 물질을 층으로 형성하는 과정)의 장비 유지 및 보수 담당이었다. 일명 ‘클린룸’에서 증착 공정 설비에 투입해야 하는 각종 가스들을 교체해 투입하거나 이 가스들이 누출되는지를 직접 코로 맡아가며 점검해야 했다. 부품을 불산 수조에 담갔다가 빼고 시너, 에틸렌글리콜 등 각종 유기용제로 설비를 닦아내는 일도 했다. 클린룸 내부 옆 공정에서는 벤젠·포름알데히드·아르신·비소 등의 유해물질을 다뤘다. 이 물질들은 모두 국제암연구소가 정한 1에이(A) 등급의 발암물질이다.
2011년 건강검진 복부 초음파에서 이상한 혹이 발견됐다. 큰 병원에 가보니 콩팥 위에 있는 호르몬 생성기관인 ‘부신’에 종양이 생겼다고 했다. 2018년부터는 몸에 이상한 발진이 나기 시작했다. 병의 재발을 알리는 신호였다. ㄱ씨는 37살이던 지난 2020년 부신암(악성크롬친화세포증) 진단을 받았다. 100만명 중 2만∼8만명이 걸린다는 희귀암이었다.
ㄱ씨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발병 요인은 일터 환경밖에는 없었다. 부신암은 가족력이 없는 경우가 더 많고 주로 40∼50대가 진단받는 질병이다. 가족력이 없이 발생하는 경우 약 40%는 유전자 변이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ㄱ씨는 유전자 검사까지 했지만 유전자 변이도 발견되지 않았다. 평소 일을 하면서도 안전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못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고, 이미 다리쪽에 혹이 생겨 중증 치료를 받고 있는 동료들도 있었다. ‘매캐한 냄새’를 맡으면 늘 불안했지만, 최대한 빨리 작업을 끝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ㄱ씨는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신청을 했다. 하지만 “해당 공정과 부신암의 직업적 요인이 알려져 있지 않고, 작업 과정에서 다룬 물질 사이에 연관성을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가 없다”며 ㄱ씨의 신청을 거부했다. 공단은 업무관련성 전문조사도 하지 않았다. 부신암과 관련한 환경적 요인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조사를 할 필요도 없고, 산재도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결국 ㄱ씨는 법원으로 가야 했다. 2022년에 공단을 상대로 요양불승인처분을 취소해달라고 소송을 냈다. ㄱ씨가 업무를 하면서 다뤄야 했던 16가지가 넘는 유해물질들을 증명하고, 코로 맡고 손으로 만지며 어떻게 유해물질과 접촉했는지를 밝혔다.
서울행정법원 행정6단독 윤성진 판사는 지난달 23일 공단이 산재 불인정을 취소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부신암 진단 4년 만이었다. 희귀암인 부신암을 산재로 인정한 사례는 처음이다. 법원은 공단의 판단과 달리 “유해물질과 질병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인과관계를 부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법원은 △ㄱ씨가 취급한 유해물질의 종류가 매우 많고 △장기간 근무 뒤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빠른 시기에 발병됐으며 △유해물질과 질병이 무관하다는 점도 의학·과학적으로 증명된 게 아니라면 인과관계를 부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이번 판결은 첨단산업의 산재를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고 판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법원은 “첨단산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규명되지 않는 위험에 노출되는 노동자들의 희생을 보상하며 산업발전을 장려하는 것이 사회보험제도의 사회적 기능”이라고 봤다. 앞서 2017년 8월 대법원은 삼성전자 엘시디(LCD) 노동자의 다발성경화증을 산재로 보지 않은 원심을 파기하며 ‘첨단산업 분야 희귀병의 업무상 재해 인정 기준’을 제시했다. 대법원은 “첨단산업 분야에서는 직업병에 대한 경험적·이론적 연구 결과가 없거나 부족한 경우가 많다”며 “근로자에게 발병한 질병이 첨단산업 현장에서 새롭게 발생하는 유형에 해당하고 그 연구 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 곤란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인과관계를 쉽사리 부정할 수 없다”고 했다.
ㄱ씨를 대리한 임자운 변호사(법률사무소 지담)는 “관련 연구가 없다고 해서 인과성을 부인할 수 없다는 2017년 대법원 판례의 취지를 잘 살렸고, 이를 분명히 판시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며 “공단은 불필요한 항소를 하지 말고, 판결 결과를 수용해야 할 것”이라고 짚었다.
ㄱ씨는 한겨레에 “몸이 아픈데, 소송이라는 장벽까지 넘어야 해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며 “앞으로 반도체 노동자를 비롯한 첨단산업 노동자에 대한 산재 인정이 더 폭넓게 이뤄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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