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밥·찌개… 누구랑 함께해도 행복햄[이우석의 푸드로지]
수천년전 만든 저장식 육류
돼지 뒷다리살 통째로 염장
군사·항해식량 등으로 이용
스페인 ‘하몬’ 치즈같은 식감
中 ‘훠투이’ 국물 감칠맛 내
한국선 ‘덩어리햄’ 가장 유명
온 천지에 가득한 가을의 풍요도 그리 오래가진 않는다. ‘개미와 베짱이’ 우화처럼 곧 차가운 겨울이 온다. 4계절이 있는 곳에 살았던 인류는 항상 겨울에 대비해 식량을 저장해 왔다. 순대도 김치도 치즈도 그런저런 사연이 있는 저장 음식이다.
농경 사회에서 채소가 주요 저장식이라면 목축을 하는 낙농 사회에선 육류와 유제품(乳製品)을 저장한다. 치즈와 버터부터 햄과 소시지, 육포 같은 고기를 쟁여놓고 겨우내 먹는다. 이 중 햄은 역사가 꽤 오랜 저장식 육류다. 최근에 발명된 음식인 것 같지만 실은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로마 시대에도 염장 돼지고기 햄을 취급하는 상점이 있었고, 요즘 슈퍼나 백화점에도 햄(델리) 코너가 따로 있을 정도로 현대에도 주요한 먹거리가 됐다.
여기서 햄과 소시지를 헷갈리면 안 된다. 햄은 살코기, 특히 돼지 다리를 통째로 염장한 것이며 소시지는 살코기와 선지 등을 창자에 넣고 그대로 말리거나 훈제한 것이다. 아예 부위가 다르니 우리가 평소 말하는 ‘햄 소시지’라 합쳐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다.
햄(ham)은 본래 ‘뒷다리살’이란 뜻. 어디선가 따로 나온 이름이 아니고 원래는 가축의 부위를 뜻하는 개념이다. 스페인어 하몬(Jamon)과 프랑스어 장봉(Jambon) 또한 마찬가지 어원이다. 메이저리그나 국내 야구선수들이 가끔 입는 부상 부위 중 햄스트링 근육(ham string muscle)이 있는데 이 역시 오금 위 허벅지 뒷부분을 뜻한다. 뒷다리 두툼한 살은 역시 햄이 어원인 것이다. 심지어 중국 남부의 햄인 훠투이(火腿) 역시 넓적다리 퇴(腿)자를 쓴다. 놀랍게도 모두 같은 뜻이다. 이탈리아에선 프로슈토(Prosciutto), 독일에선 싱켄(Schinken)이라고 한다. 햄과는 어원이 다르지만 같은 부위를 염장한 음식을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유럽과 중국에서 ‘햄’이라 함은 반드시 ‘돼지 뒷다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스팸처럼 잡육을 갈아서 만든 것이나 돼지의 다른 부위, 아예 다른 가축의 고기를 쓰면 엄밀히 얘기해 햄이라 부를 수 없다. 숄더햄(돼지고기 잡육), 베이컨(돼지 뱃살), 퍼스트라미(소고기 염장육), 콘드비프(소고기) 등은 햄이 아닌 염장육의 일종으로 봐야 한다. 햄이 원래 염장한 고기를 뜻하는 게 아니고 적확히 ‘돼지 뒷다리’란 뜻인 까닭이다. 커다란 돼지 뒷다리를 뼈다귀째 소금에 절인 후 숙성해 만든 것(bone in ham)과 발골한 고기 토막을 쓴 것(boneless ham) 등 모양새는 다르지만 아무튼 햄엔 돼지 뒷다리만을 썼다.
이런 방식만이 원래의 햄이지만 요즘 한국이나 일본에선 잡육을 섞어 고형화시킨 것까지 포함해 몽땅 햄의 범주에 넣기도 한다. 그런 종류의 통조림 햄을 먼저 접했던 탓이다. 참고로 부연하자면 햄버거(hamburger)의 햄은 이와도 완전히 다르다. 독일식 함부르거 스테이크(Hamburger steak)에서 햄과 버거를 따로 뗀 말로 염장육 햄(ham)과는 상관없다. 햄버거엔 돼지고기 뒷다리살 햄을 넣지 않고 소고기를 갈아서 뭉친 패티를 쓰는 것이 원칙이다. 소금물을 발라 그늘에 보관하고 향신료를 가미하거나 연기를 쐬어 훈향을 입히는 등 훗날의 노력이 더해져 다양한 맛의 햄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지구상에는 생각보다 정착 목축 사회나 유목 사회가 많았던 까닭에 유럽은 유럽대로 중국과 서남아시아 등에선 각기 그 나름대로의 햄 종류가 탄생하게 됐다. 처한 환경은 달랐지만 스페인(하몬)과 이탈리아(프로슈토) 등 남유럽 것과 중국 훠투이가 서로 가장 닮아있다.
그냥 고기도 먹을 수 있는데 굳이 햄을 만들었던 이유는 처음엔 고기를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나중엔 특유의 맛이 좋아서 만들게 됐다. 잘 만들어진 햄은 방금 도축한 신선한 생고기보다 별미로 인식돼 더 비싼 값을 받았다. 특히 소금이 귀했던 중세엔 일손이 많이 가고 원가가 더 드는 햄이 비싼 값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햄은 계절과 관계없이 장기 보존과 휴대가 편한 덕에 군사 식량과 장거리 항해 선박의 상비 식량으로 널리 사용됐다. 대신 햄은 비싸니 높은 계급의 군인과 선장 정도만 먹을 수 있었고 나머지 하급 군인과 선원들에겐 여러 부위를 절인 염장육을 지급했다. 산업혁명 이후 식생활이 개선되며 상업이 발전하니 햄 또한 귀한 몸값을 받았다. 도시에는 마찬가지로 보존성이 높은 소시지와 베이컨, 육포 등도 함께 만들어 파는 가게가 생겨났다. 육가공품 가게인 샤퀴테리아(Charcuterie)의 탄생이다.
원래 햄은 상하기 쉬운 육류를 오래 보관하려는 의도로 비롯됐으나, 염장 후 보존하는 동안 발효가 되어 특유의 풍미가 생겨나 오히려 인기를 끌고 있는 일종의 ‘간고등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안동 간고등어’처럼 햄 중에서도 지역마다 ‘특산 명품’이 생겨났다.
가장 유명한 것은 스페인의 하몬. 하몬은 도축 전 도토리만 먹여 키우는 이베리코 흑돼지를 일 년에서 수년까지 숙성시켜 만드는 등 프리미엄 브랜드의 명성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하몬 세라노 등 대중적 제품도 있지만 하몬 이베리코가 세계적 인지도를 지니고 있다. 오랜 숙성을 거쳐 특유의 풍미를 담뿍 지닌 하몬은 얇게 썰어도 부드러운 기름 속 짙은 풍미를 낸다. 2~3년 정도 숙성시킨 하몬 이베리코를 씹으면 블루치즈처럼 부드럽고 마치 오래된 가구에서 나는 우드 향이 입안에 은근히 퍼진다.
한국인의 입맛엔 짭조름한 정도가 아니라 굉장히 짜다. 야박하다 싶을 정도로 얇게 저며 수분 많은 멜론이나 소금기 없는 밍밍한 빵에 얹어 먹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염도가 높으니 하몬은 훌륭한 반찬도 된다. 하몬 하나로 밥을 먹어도 그리 궁핍해 보이진 않는다. 하몬은 같은 무게의 일반 생고기보다 10배 이상으로 비싸다. 최상품 하몬 이베리코는 세계적으로도 육류 중 가장 비싼 상품으로 알려졌다.
중국의 훠투이 역시 남다른 관리를 통해 생산된다. 특히 찻잎과 배추 사료만 먹여서 키운 진화훠투이(金華火腿)가 맛과 향이 좋기로 소문났다. 진화(시)는 중국 저장(浙江)성의 한 지역명이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훠투이는 역사와 전통이 있다. 중국 남송의 군벌 종택(宗澤)이 저장성 출신들이 즐겨 먹던 염장 돼지고기에 주목해 전투식량으로 썼고 이후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 이후 고종에게 염장 고기를 진상했더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훠투이란 이름을 지어줬다고 한다.
하몬과 마찬가지로 소금에 절여 오랜 시간을 숙성시킨 훠투이는 국물을 내거나 잘게 썰어 볶음밥에 넣어 먹는다. 하도 감칠맛이 진해 XO소스를 내는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가끔 고급 식당에선 꾸덕꾸덕한 훠투이를 두툼이 잘라 빵에 그냥 싸먹기도 한다. 이를 ‘부귀화퇴’라 하는데 비싼 훠투이로 국물을 내는 것이 아니라 고깃덩이째 그대로 먹기에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훠투이 역시 하몬처럼 가격 편차가 심하다. 서민들이 쉽게 살 수 있는 것도 많지만 진화훠투이(금화햄이라 부르기도 한다)처럼 최고급 제품은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값도 어마어마하다.
독일의 족발 격인 슈바인스학세 역시 햄의 일종으로 보기도 한다. 지금의 것과는 달리 원래 염장해서 숙성시킨 돼지 족발이 그 원형이다. 넓적다리는 아니지만 족발을 절여서 건조하거나 훈연을 하는 방식은 생햄과 똑같다. 생햄은 생고기보다 단백질이 많고 발효 과정에서 생겨난 비타민 등이 풍부하다. 여기다 제조 과정에서 가미하는 향신료, 함께 곁들이는 과일이나 채소까지 포함하면 좀 더 영양학적으로 균형을 맞춘 음식이 된다.
역사가 오래된 만큼 햄을 먹는 방법도 다양하다. 우리나라에선 생햄을 맛보는 식문화가 생소하지만 얇게 저민 햄을 빵에 끼워 먹거나 멜론에 감싸 전채로 먹는 모습이 그나마 낯익을 것이다. 짭조름하기 때문에, 아니 비싸기 때문에(?) 반드시 얇게 저며야 한다.
국내에선 고기를 염장해서 만든 생햄보다는 시판되는 프레스햄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프레스햄은 발라낸 고기를 갈아서 밀가루, 소금, 아질산나트륨 등 첨가물을 넣고 압착(press)한 덩어리 햄이다. 시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햄이 죄다 프레스햄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스팸도 프레스햄에 해당한다.
세월은 흘러 이제 햄은 우리 식생활에 빠질 수 없는 식재료가 됐다. 샌드위치 등 양식에만 쓰는 것도 아니다. 그냥 볶거나 구워서 밥과 함께 먹기도 하고 이를 넣고 부대찌개를 끓여 먹는다. 햄 볶음밥이나 김밥에 소로 넣기도 한다. 분류상 햄이라 할 순 없지만 통념상 햄이 바로 이런 프레스햄이다. 니혼햄, 롯데햄(현) 등 한국과 일본의 햄 제조사들이 수십 년간 프레스햄의 저변을 넓혔다.
식욕을 자극하는 짭짤한 햄 한 조각에 밥상이 풍요롭다. 특히 최근 각광받고 있는 수제 생햄 한 덩이만 찬장에 놓아두면 옛날 유럽의 목축인 가정처럼 겨울을 날 걱정이 들지 않는다.
놀고먹기연구소장
■ 어디서 먹을까
◇더찹샵 = 국내에서 수제 생햄으론 첫손가락을 꼽는 선구자가 운영하는 샤퀴테리아다. 해발고도 500m 남원시 동편제 마을에서 흑돼지 버크셔K로 만든 샤퀴테리(하몬, 프로슈토, 살라미, 장봉, 관찰레 등)를 제조 및 판매하는 곳. 3년 이상 숙성한 하몬과 다양한 염장육 생햄을 맛볼 수 있어 많은 이들이 찾는다. 생햄 전시 판매장이 주요 공간이지만 실내 테이블과 풍경 좋은 테라스에서 샤퀴테리를 맛보는 체험도 진행 중이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가산화수길 71-15.
◇쿤스트라운지 = 남해독일마을 앞 언덕에 그림 같은 건물을 짓고 독일식 음식과 음료를 내는 집. 슈니첼부터 각종 소시지를 맛볼 수 있으며 돼지 앞다리 발목 부분을 오랜 시간 훈제 조리한 슈바인스학세도 즐길 수 있다. 염장해 약한 열로 구워낸 발목은 바삭한 껍질과 부드러운 비계, 고소한 살점까지 3박자가 잘 어우러져 묵직한 독일식 맥주를 저절로 넘어가게 한다. 통창 너머 남해 옥빛 바다와 물건리 어부방조림이 함께 자아내는 목가적 풍경은 덤이다. 경남 남해군 삼동면 독일로 34.
◇송쌤 수제햄 부대찌개 = 부대찌개를 파는데 수제햄을 쓴다. 따로 작업장을 두고 부대찌개에 어울리는 100% 돼지고기 햄과 수제 소시지를 제조한다. 야들야들한 햄 조각과 졸깃한 소시지가 각종 신선 채소와 함께 들어가 한소끔 끓는 사골 육수에 녹아나면 ‘송쌤식’ 부대찌개 완성이다. 어디서 쉽게 맛보기 어려운 중후한 국물 맛을 낸다. 청결고추 산지인 괴산군답게 칼칼한 양념을 쓰지만, 녹진한 햄과의 조화로 그리 맵게 느껴지지 않는다. 충북 괴산군 괴산읍 읍내로10길 20.
◇남기남 부대찌개 명동점 = 프리미엄 햄을 쓰는 부대찌개를 내세우는 집. 쌈으로 싸도 될 정도 크기의 본레스 햄을 한가득 찌개에 덮어준다. 각종 햄에 베이컨, 치즈까지 얹었지만 파채와 콩나물 등 시원하고 수분 많은 채소가 내는 채수 덕에 느끼하지 않다. 그 덕분에 버터를 섞은 밥에도 거부감이 없다. 반찬도 좋고 밥도 듬뿍 준다. 햄과 소시지, 우삼겹을 철판에 볶은 메뉴도 곁들이기 좋다. 인근 직장인의 점심 맛집. 명동에 가득한 외국인도 어찌들 알고 찾아온다. 서울 중구 명동4길 16-1 2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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