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록보다 실패한 모험이 진정한 모험" [기후위기 탐험가 알렉스 벨리니]
제9회 울산울주산악영화제에 이탈리아의 유명 탐험가 알렉스 벨리니가 본인의 탐험 역사를 돌아본 다큐멘터리 <오직 물과 바람만이>와 함께 참석했다. 그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극한의 모험에 환경운동을 참신한 형태로 결합하려는 시도를 거듭해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와 탐험이야기를 나눠봤다. _편집자 주
이번이 첫 내한입니다. 한국의 첫인상은?
아주 긍정적입니다. 아직 새로운 것들이 많아서 소화하고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있지만 사람들이 굉장히 친절하게 도와주고 환대해 줘서 고맙습니다. 특히 음식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좋아요.
한국에선 아직 당신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자기소개를 한다면?
저는 46세 이탈리아인입니다. 21세 때부터 쉬지 않고 모험과 탐험의 커리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처음 모험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모험을 시작하기 직전까지 회계사가 되기 위해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 생활이 즐겁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뭔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이게 아닌 다른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회계사 관련 공부가 무척 잘되고 있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회계사 일에 대해서 어떤 열정도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탐험가를 직업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뒤를 이은 건데요, 아버지가 산악모터사이클을 즐겼습니다.
회계사 준비하다 부전자전 탐험가로
간단히 본인의 모험사를 정리하자면?
2001년 사하라사막 250km 마라톤에 출전하는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알래스카에서 썰매를 끌고 2,000km를 주파하기도 했죠. 그 이후로는 바다로 눈을 돌렸습니다. 홀로 지중해에서 대서양을 넘어 직접 노를 저어 227일 동안 1만1,000km 항해했고, 2008년에는 페루에서 호주까지 294일 동안 1만8,000km를 횡단했죠. 이 두 모험이 이탈리아 내에서 꽤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전 세계적인 위험들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플라스틱 오염, 기후위기 같은 것들이죠. 그래서 거리나 시간 등 기록을 남기기 위한 탐험이 아니라 인류가 직면한 위기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자 탐험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2019년부터 시작한 '10개의 강, 1개의 바다'란 프로젝트였어요. 세계에서 가장 많이 플라스틱 쓰레기로 오염된 강 10개를 플라스틱 쓰레기로 만든 뗏목을 타고 나아가는 것이었죠.
꽤 많은 탐험에 성공했습니다.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전적으로 아내의 덕입니다. 탐험에 나서기 전 필요한 여러 가지 자료들을 아내와 함께 연구해요. 그리고 제가 놓친 부분들을 찾아내고 이를 미리 고칠 수 있도록 도와줘요.
탐험을 하는 동안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제가 가정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도록 내조해 줘요. 그래서 오롯이 탐험만 생각할 수 있죠.
그중 가장 힘들었거나 기억에 남는 모험은 무엇인가요?
2008년 페루에서 호주까지 진행한 횡단입니다. 도착까지 고작 100여 km를 남겨 놨는데 날씨가 너무 거칠어져서 여정을 중단해야 했습니다. 10개월이나 혼자 노를 저어 태평양을 건너와 눈앞에 성공을 앞둔 상태였는데 생존자체가 위험해져서 취소할 수밖에 없었어요. 당시에는 그 경험이 저를 너무나 힘들게 했습니다. 원래 페이스라면 딱 36시간만 더 노를 저으면 됐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가장 만족감을 준 모험이 됐습니다.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모험의 결과는 제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다만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탐험 자체의 품질을 높이는 것, 그리고 통제되지 않은 결과에 대한 반응을 결정하는 것뿐이죠.
한국 사회도 그렇다고 들었는데, 이탈리아 역시 과다경쟁으로 인해서 승자독식주의가 팽배한 사회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어떻게 실패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아요. 위대하게 실패하는 법 말입니다. 오로지 신기록을 만드는 것만이 성공이 아니고, 하나의 인간으로서 내가 가진 한계 속에서 어떻게, 무엇을 했는지가 중요하죠.
2008년 당시의 실패는 너무나 유명해서 한국에서도 보도된 바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더 이상 망망대해에 나가지 않고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방금 말한 실패에 관한 깨달음을 얻기 전이라 그렇게 말한 걸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제가 봤을 땐 번역 과정의 문제 같아요. 당시 호주 땅을 밟자마자 누군가가 "재도전하겠냐?"고 물었습니다. 이미 이것은 저에게 끝난 모험이기 때문에 단지 "다시 똑같은 루트로 횡단하고 싶지 않다"고 답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 모험은 하나의 의미를 만들며 그 자체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살아서 배에서 내렸고, 그 여정을 통해 제가 조금 더 삶과 모험에 대해 성숙한 태도를 갖게 만들어줬기 때문이죠.
바다를 주 무대로 탐험했는데, 산은 모험의 장으로 잘 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산이 싫기 때문인가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제 고향이 이탈리아 산골입니다. 그래서 모험에 대한 열망도 산에서 키울 수 있었어요. 어릴 적 여러 암벽을 등반하면서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었죠. 도무지 등반할 수 없을 것 같은 매끄러운 벽도 잘 찾아보면 아주 작은 홀드가 있어서 이를 밟고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이죠. 저는 등반을 사랑합니다.
다만 스스로 등반가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단순히 수직적인 것보다 수평적인 것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기후위기 프로젝트 중 체포되기도
본격적으로 기후위기를 탐험에 녹인 프로젝트 '10개의 강, 1개의 바다'는 분명 좋은 의미에서 시작한 것인데, 지난해 이 프로젝트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상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단지 미세플라스틱 쓰레기로 인한 오염에 대해 경각심을 제고하고 싶었을 뿐인데 기후변화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마치 이 프로젝트를 '불편한 진실'을 캐내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서 이를 어떤 식으로든 막으려고 해요. 먼저 10개 대상지인 강 중 여러 개가 중국에 있었어요. 강 하나는 무사히 완주했는데 다른 강을 모험하려고 하니 중국 정부에서 제동을 걸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심지어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해양경찰들이 출동했어요. 이유도 분명치 않았어요. 체포 이유가 '여기서 노를 젓는 이유가 불분명했기 때문'이었을 정도니 우스꽝스럽죠. 아마 지난 15년 동안 이탈리아와 이집트의 외교관계가 다소 불편한 사이였던 점도 작용했을 겁니다.
2019년 인도 갠지스강을 항해하는 도중에 물고기를 잡고 있는 한 어부를 만났죠. 당시 저는 화가 많이 난 상태였어요. 강물에 썩어가는 동물 사체들이 둥둥 떠다니는데 그 누구도 치우려 하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그 어부에게 "대체 왜 이 강에 깃들어 사는 사람들은 사체들을 건져 올려서 매립하거나 소각하지 않냐?"고 물어봤죠. 돌아오는 대답이 가관이었습니다. "갠지스강은 정말 길어서 남쪽에 있는 누군가가 치울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죠. 어떻게 보면 이것이 대부분의 인류가 환경 위기에 대한 기본 값과 같은 생각이겠죠?
한국에서도 일부 등산 인플루언서들이 산행에 환경 문제를 결부시킨 바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플로깅인데, 일부 대중들은 '보여주기식 행사다', '진정성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하는데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일종의 '그린 워싱(기업들이 실제로는 환경에 악영향을 끼치는 제품을 생산하면서도 광고 등을 통해 친환경적인 이미지를 내세우는 행위)'을 말하는 거군요. 이해합니다. 이것 또한 문제죠. 분명 단순히 돈을 벌고 싶어서 본인을 환경운동가처럼 꾸미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기후위기가 더 큰 문제란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해요. 또 탐험가들이 변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죠. 탐험가들은 자연과 야생에 가장 깊숙하게 살고, 피부로 이를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환경과 지속가능성에 대한 메시지를 더 진정성 있게 던질 수 있죠. 아무리 등산이나 등반을 잘하고, 탐험을 잘하는 사람이더라도 환경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스폰서십을 받기 어려운 현실도 고려해야 합니다.
2014년부터 프로 스포츠선수들의 1일 멘털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건가요?
이탈리아 일부 프로 선수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많은 선수들은 '현재만 집중하기'를 못 해요. 즉 한 번 실수했다거나, 불안한 미래가 예상된다거나 하면 오롯이 현재의 플레이에만 집중하지 못하고 이로 인해 자멸하곤 하죠. 그래서 '과거는 변화시킬 수 없고, 미래 또한 통제할 수 없으니 현재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를 선수들에게 주려고 노력합니다. 명상과 최면요법 등을 통해 마음을 다룰 수 있도록 도와줘요. 구체적인 커리큘럼은 물론 영업비밀이고요.
이번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오직 물과 바람만이>에선 '가장 도전적이고 불안정적인 상황에서 살아 있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영상의 끝은 가족들과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모습으로 마무리됩니다. 서로 대조되는 모습인데 어떤 게 진짜 벨리니인가요?
혹시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요? 저는 제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살아가고 있어요. 탐험에 나섰던 것도 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함이었죠. 내가 누구인지 알아야 그 후에 비로소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그런 자기발견의 과정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고요.
반대로 그런 삶이 있는 반면, 가족들로부터 오는 소속감과 유대감 또한 중요하죠. 어쩌면 진자 같아요. 떨어뜨린 높이와 꼭 똑같은 높이만큼 반대편에 치솟아 오르는 것처럼 안정성과 불안정성, 이 두 극단이 중화돼 존재하는 이가 바로 저인 셈이죠.
다음 모험은 어디로 떠날 예정인가요?
프로젝트명은 '아이즈 온 아이스Eyes on ice'입니다. 극지방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에게 기후변화가 실제로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두 다리로 수천 km를 걸으며 알아볼 예정입니다. 모든 나라가 기후변화를 겪고 있지만, 특히 극지방은 매년, 혹은 매달 엄청나게 큰 폭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2024년에는 알래스카를 가로지르는 자전거 여행을, 2025년에는 그린란드 횡단, 2026년에는 북극해를 건너 북극으로 가는 시도를 합니다. 현장에서 오는 목소리는 그 힘이 훨씬 강하다고 믿습니다.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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