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때문에 ‘재밌는’ 기사를 못 읽네 [찾아가는 독자위원회]
열흘이 많은 것을 바꿨다. 박슬기씨는 2년 전 행정안전부의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 참가자로 경주를 찾았다. 서울 생활에 지쳐 있을 때였다. 감포 바다 환경정화 활동(플로깅)을 하면서 이주를 결심했다.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옛 경주역 인근 구도심에 세를 얻어 2023년 2월28일 ‘너른벽’이라는 서점을 열었다. 페미니즘·퀴어·장애·이주·환경을 키워드로 서가를 채웠다. 이주노동자 거주 비율이 높고, 성매매 집결지가 여전히 운영 중인 동네였다. 박씨는 경주여성노동자회 비상근 활동도 시작했다. 이주 배경 청소년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성매매 집결지 실태조사를 위한 활동을 하기도 한다. 너른벽은 그 모든 활동의 베이스캠프다.
〈시사IN〉 ‘찾아가는 독자위원회(찾독위)’ 네 번째 모임이 10월11일 경북 경주 너른벽 서점에서 열렸다. 전날 발표된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작은 동네서점에도 활기를 선물했다. 이날 오전에도 평소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도서를 따로 주문해 구매하곤 하는 한 어르신이 서점에 들렀다. “기사에 소개된 내용을 보니까 (한강 작가가) ‘공산당’ 같긴 한데, 그래도 한번 읽어봐야겠어”라며 한강 작가의 책을 주문하고 갔다. 오프라인 서점은 점점 사라지고, 온라인 서점 이용은 쉽지 않은 어르신들이 그렇게 ‘페미니즘 서점’의 문턱을 드나든다. “더 많은 사람이 발을 들여놓을 수 있도록 너른벽을 추구해야 합니다(〈제로의 책〉, 최승준)”라는 말에서 따온 이름답게.
너른벽에서는 한 달에 한 번 4~5명이 모이는 〈시사IN〉 읽기 모임이 열린다. 먼저 커버스토리 위주로 이야기를 나눈 후 그 밖에 각자 좋았던 기사를 하나씩 꼽아 소개한다. 찾독위가 열린 날에는 기존 멤버인 박슬기 대표와 정한신·이상홍·김아라씨 외 4명이 새로 참석했다. “뉴스를 끊은” 서완·김세환 부부는 찾독위 소식을 듣고 답답해서 나와봤다. “그래도 같이 이야기하다 보면 염세주의에 좀 덜 빠질까 싶어서.” 박슬기 대표처럼 청년마을 만들기 사업 참가를 계기로 경주에 정착한 박서영씨도 비슷한 이유였다. “세상이 좀체 안 바뀌는 것 같아도 모여서 이야기하다 보면 제 마음가짐이 일단 달라지는 것 같다.” 너른벽이 생긴 후 아지트 삼아 서점을 드나드는 송재경씨와 “양산에서도 독자 모임을 만들고 싶어서” 참석한 백아형씨까지 모두 아홉 명이 〈시사IN〉 제884호부터 추석 합병호인 제887·888호까지 펼쳐두고 이야기를 나눴다.
■ 제884호 돌아온 이승만
‘단독’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전생 같다.” 불과 한 달 전 일인데도 새삼스럽다. 박슬기 대표는 제884호 커버를 들어 올리며 ‘전생’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빠르게 격변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상홍 경주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이 펼친 〈시사IN〉에 참가자들의 눈길이 모였다. 형광펜이 반듯하게 그어져 있는 지면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이 워낙 꼼꼼히 읽으니까 안 할 수가 없다(웃음).” 이렇게 읽어도 기억이 안 난다고 그가 덧붙였다. “이게 다 머릿속에 있으면 사람이 못 산다.”
윤석열 정부가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강행하며 벌어진 ‘역사 전쟁’을 살피는 제884호 커버스토리는 신선영 사진기자와 이상원 기자의 소소하지만 의미심장한 ‘단독’이 포함되어 있다. 광복절 경축식에 불참한 광복회를 비롯한 56개 독립운동단체가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따로 기념식을 치렀는데, 이날 현장 스케치 사진에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찍혔다. 이 교수는 이종찬 광복회장의 아들이자 윤석열 대통령의 오랜 친구다. 대선 당시 윤석열 후보를 돕기도 했다. 찾독위에 동행한 신선영 사진기자가 “(이철우 교수인지) 모르고 찍은” 사진이다. 때로 단독은 예상치 못한 선물처럼 찾아온다. 그 사진에서 이철우 교수의 얼굴을 알아본 이상원 기자는 제885호에서 이 교수 인터뷰를 후속 보도(‘‘역사 전쟁’ 한복판에 선 대통령의 친구’)했다.
전국 인사이드 연재는 너른벽 독자들이 특히 눈여겨보는 지면이다. 경주에서 제로웨이스트 용품점 ‘밭매기’를 운영하고 있는 김아라씨는 전국 인사이드를 통해 여러 아이디어를 얻는다고 말했다. “온갖 뉴스가 서울 중심이다 보니 아쉬울 때가 많은데 우리 지역은 아니지만 다른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알 수 있어서 활동하는 데 참고도 되고, 응원도 받는다. ‘전국 뉴스’가 되지 않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발굴해주는 지면이라 정말 소중하다.” 박슬기 대표는 당부의 말을 더했다. “지역일수록 이주 배경 인구 문제가 없는 곳이 없다. 경주에서 근무하는 한 간호사 이야기로는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 10명 중 8명이 미등록 이주노동자라고 하더라. 관련해 〈시사IN〉만의 관점이 담긴 기사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 제885호 상속세, 우리 집도?
윤석열 대통령에게 달렸다
독자들이 주섬주섬 제885호를 펼치자 숨고 싶었다. 커버스토리 편집 과정에서 큰 오류가 걸러지지 않은 채 발행돼 이후 편집국 내 큰 파장을 일으켰던 ‘문제적’ 호수다. 일부 문장에서 ‘상속인’과 ‘피상속인’이 혼동되어 표기된 것. 이후 ‘바로잡습니다’를 내고 편집국장을 비롯한 책임자들에 대한 징계 절차도 밟으며 편집국의 긴장도가 바짝 올라갔다. 하지만 이미 발행된 ‘오류’는 돌이킬 수 없는 것. 〈시사IN〉 기자들에게는 사실 다시 펼쳐보고 싶은 호가 아니다.
“역시!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부끄러워하는 기자를 보며 정한신씨가 밝게 웃었다. 이상홍씨는 기사 자체는 좋았다고 격려했다. “다른 언론이 상속세를 다루는 관점과 김동인 기자가 다루는 관점이 굉장히 다르다. 이런 기사들이 〈시사IN〉의 강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앞으로 10~20년 뒤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한 인구학적 접근을 많이 한다. 우리가 무엇을 대비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기사들이다.” 다만 커버스토리가 연관 기사 없이 기사 하나로만 그칠 때가 많아서 아쉽다는 지적도 나왔다. 커버스토리가 〈시사IN〉에서 그 주에 가장 힘주어 내는 기사인 만큼, 해당 이슈의 여러 관점을 패키지처럼 볼 수 있는 부속 기사도 실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참사의 얼굴은 왜 이리도 다 비슷할까.” 서완씨는 경기 화성 아리셀 참사를 기록한 포토IN 사진을 오래 바라봤다. “내가 언제 이렇게 카메라 앞에 서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내 차례는 언제일까 싶고. 그래서 뉴스를 외면하면 안 된다는 건 알겠는데, 쉽지 않다.” 둥글게 모여 앉은 이들이 공감의 의미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김아라씨는 문화 기사도 커버스토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재미도 있고 더 읽고 싶은 문화 기사도 있는데, 〈시사IN〉 커버스토리는 정치·사회 쪽에 치중되어 있는 것 같다. 커버스토리가 되는 기준이 있나?” 이번 찾독위에서 논의된 〈시사IN〉을 쭉 늘어놓고 보니, 역시 ‘윤석열 대통령에게 달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전쟁, 상속세, 의료 대란, 대통령 신뢰도까지. 그러고 보니 모두 ‘용산발’ 뉴스였다.
■ 제886호 한 구급대원의 편지
사진기자의 이름을 유심히 본다는 것
커버스토리 이미지를 찍기 위해 조남진 사진팀장이 새벽까지 한 병원 응급실 근처 육교 위를 지켰다는 이야기에 가벼운 탄식이 이어졌다. “기사 시작 지점에 붙어 있는 기자명(바이라인)만큼이나 사진 옆에 작게 붙은 사진기자 이름도 유심히 보겠다”라는 다짐도 오갔다. ‘미워하기 싫다’라는 제목의 편집국장의 편지가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는 이야기도 오갔다. 외고(익명의 구급대원, 익명의 의대생)가 커버스토리와 함께 배치된 것에 대해서도 질문이 나왔다. 기고를 해준 두 분 모두 취재원으로 만났다가 기사 속 ‘워딩’으로만 쓰기에 아까울 정도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덕분에 기고로 이어졌다는 설명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추석 합병호(제887·888호)부터 잠정적으로 지면에서 빠진 프런트 페이지(말말말·뉴스 콕)에 대한 의견은 갈렸다. “긴 기사를 읽기 전에 워밍업하는 느낌으로 보는데 사라져서 아쉬웠다(박슬기)”부터 “주간지라 내가 책을 받아 보는 시점에선 이미 옛날 얘기인 경우가 많아서 굳이 지면을 써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서완)”라는 의견이 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다는 정한신씨는 “일단 ‘말말말’ 지면을 읽으면 기분이 나빴는데 없어지니까 좋았다”라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박슬기 대표는 “긴 기사가 가진 장점도 있지만, 따라 읽기 숨찰 때도 있다”라고 말했다. ‘짧은 글이 많은 뒤 페이지부터 읽는 것도 한 방법’이라는 꿀팁(?)에 “아예 만우절 같은 때 특별판처럼 거꾸로 배치해도 재밌겠다”라는 농담이 오갔다.
■ 제887·888호 심리적 탄핵
이웃의 얼굴로 돌아보는 한국 사회
기사 제목은 누가 다는 걸까? 기자가 기사를 마감하면 공정의 50%쯤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각 팀 팀장과 편집국장의 데스킹을 거쳐 편집소통팀-교열팀-미술팀으로 이어지는 제작 부서가 나머지 공정 50%를 담당한다. 기본적으로 편집국장과 함께 제목, 발문(제목 아래 3줄 문장), 중간 제목, 사진설명 등의 완성도는 편집팀이, 오타와 비문의 제거는 교열팀이, 지면의 배치와 디자인은 미술팀이 책임진다. 특히 표지 이미지와 제목은 모두가 마지막까지 고민을 거듭한다.부울경 지역을 중심으로 〈시사IN〉 읽기 모임 여럿에 참여하고 있는 일상학교 정한신씨는 직관적인 표지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표지만 봐도 내용을 짐작할 수 있어야 독자 모임 모객에 유리”하다는 이유였다. 그런 제목으로 제886호 ‘한 구급대원의 편지 “붕괴되고 있습니다”’와 추석 합병호(제887·888호) ‘심리적 탄핵’이 꼽혔다.
특히 추석 합병호 표지 제목 ‘심리적 탄핵’이 “너무나 적절해서 어떻게 결정됐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 이 제목은 김은지 정치이슈팀장이 역대 최저치를 기록한 현직 대통령 신뢰도 조사 결과를 받고 제일 처음 한 말이기도 했다. 한편 신뢰도 조사가 실리는 합병호는 “기대가 안 된다”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매년 예측 가능한 숫자가 나오기 때문이다. “임팩트가 별로 없는데 비슷한 것을 매년 보는 피곤함이 있다. 숫자 자체도 중요하겠지만, 날카로운 분석과 의미를 더 짚어준다면 좋겠다(백아형).”
딥페이크 기사 반응은 특히 뜨거웠다. 너른벽에서 열린 지난달 〈시사IN〉 읽기 모임에서 딥페이크 관련 기사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데만 한 시간을 훌쩍 보내기도 했다고. 특히 ‘딥페이크, 반드시 잡힌다’라는 표지 소제목이 “힘이 됐다”라는 의견이었다. 송재경씨는 “무조건 잡아서 처벌을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기술적으로 단계를 번거롭게, 귀찮게 함으로써 막는 방법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라고 말했다. 박슬기 대표는 “지역에서도 관련 논의를 어떻게 이어나갈 수 있을지 고심하던 중에 만난 반가운 기사였다”라고 덧붙였다. 박서영씨는 고등학생인 동생네 반에 피해자가 생기면서 발칵 뒤집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범죄가 발생했는데도 학교 지침이 ‘인스타그램 비공개로 돌려라’였다. 어른으로서 너무 미안하더라. 놀이나 장난이 아니라 범죄라고 문제 제기를 계속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슈화될 수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연재되는 은유의 ‘먹고사는 일’ 기획에 대한 호평도 이어졌다. 유명인이 아닌 평범한 이웃의 목소리로 우리 사회를 돌아볼 수 있다는 이유였다. 그저 ‘잘 읽는’ 걸로 그치지 않았다. “우리가 급식 노동자의 이야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게 그분들이 일하는 위험한 노동환경 문제인데, 그 부분까지 좀 더 연결해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정한신).”“문제를 제기하는 것만큼이나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분들의 모습을 언론이 〈시사IN〉처럼 계속 조명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헌신과 자부심을 해치지 않고 지켜주는 방식으로. 또 노동환경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도록(김아라).”
※다섯 번째 찾아가는 독자위원회는 11월8일 강원 속초 ‘완벽한 날들(인스타그램 @perfectdays_sokcho 0507-1405-2319)’에서 열립니다. 12월에는 경기 안성 ‘다즐링 북스(@darjeeling_books 0502-1932-8732)’ 2025년 1월에는 경북 포항 ‘달팽이책방(@bookshopsnail 070-7532-3316)’ 2월에는 강원 춘천 ‘책방 바라타리아 (@barataria.bookstore 0507-1325-3180)’ 3월에는 전남 여수 ‘거기책방다섯 (@bookshopfive 010-8212-5745)’ 4월에는 대구 ‘나른한책방(@nareunhanbooks 0507-1356-5186)’에서 모임이 열립니다. 관심 있는 독자께서는 개별 서점에 문의 바랍니다. 〈시사IN〉 독자 모임을 만들어보고 싶은 다른 동네서점의 신청도 환영합니다(문의: ilhostyle@sisain.co.kr).
경주·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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