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귀환] “올 것이 왔다”… 셈법 복잡해진 재계
현대차는 ‘미국통’ 외교관 영입 늘려
로비 줄인 포스코, 관세 등 대응 고심
제47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승리가 확실시되면서 변화할 미국의 정책에 대응하기 위한 국내 주요 그룹의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다. 주요 그룹은 미국 대선을 앞두고 대미(對美) 로비 창구를 확대하는 등 트럼프 당선인 시대를 준비해 왔다.
트럼프 2기 정책에서 국내 기업이 긴장하는 사안 중 하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의 폐기 여부다. IRA는 미국에서 생산된 배터리와 이를 탑재한 전기차에 보조금을 주는 법안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여러 차례 이 법안에 비판적인 입장을 밝혀왔다. 만약 IRA가 폐기되면 미국에 배터리 투자를 크게 늘렸던 SK그룹과 LG그룹은 타격이 예상된다.
◇ SK·LG, 확대한 美 대관 조직 중심 대응
SK그룹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에 대비해 현지 대관 조직을 확대하는 등 여러 준비를 해 왔다. 올 상반기에는 북미 지역 대관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SK아메리카스를 출범했다. SK아메리카스는 IRA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 SK이노베이션을 포함해 SK하이닉스와 SK텔레콤 등 주력 계열사들이 출자해 만들었다. SK의 미주 지역 대관을 총괄했던 유정준 부회장이 대표를 맡아 향후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대관과 로비 활동 등에 집중할 계획이다.
그룹의 주요 의사 결정 기구인 SK수펙스추구협의회도 지난해 출범한 글로벌대외협력(GAP) 조직을 중심으로 대응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GAP는 산업통상자원부 에너지정책과장을 지냈던 김정일 SK스퀘어 글로벌비즈정책담당 부사장이 이끌었던 조직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올해 미국 상원의원단과 회동했는데, 김 부사장은 유 부회장 등과 이 자리에 함께했다.
LG그룹 역시 강화한 미국 대관 조직을 중심으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을 준비 중이다. 그룹과 주요 계열사별로 구성된 대관 조직을 총동원해 트럼프 2기에 합류할 주요 인사와 공화당 등에 대한 소통 창구를 늘리고, 정보 수집에 나서겠다는 게 LG의 계획이다.
LG그룹은 경영개발원 산하 미국 대관 조직인 글로벌 전략개발센터를 글로벌 전략개발원으로 격상하고, 인력 규모를 확대해 왔다. 그룹과 별도로 LG에너지솔루션도 지난해 전기차와 IRA 관련 대응을 강화하기 위해 해외 대관팀을 신설했다. 2022년에는 워싱턴사무소를 열고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 백악관 부비서실장을 지냈던 조 헤이긴을 소장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신재생·친환경 에너지 사업을 하는 한화솔루션과 한화큐셀 등을 둔 한화그룹 역시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대한 대응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한화 측은 트럼프 당선인이 중국산(産) 제품에 비판적인 입장을 갖고 있어 반사이익도 기대하고 있다. 한화 관계자는 “트럼프 행정부가 관세를 앞세워 저가 중국산 제품의 수입을 막을 경우 오히려 가격 경쟁력이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SK와 LG는 올해 들어 대미 로비 규모를 크게 확대한 바 있다. SK의 3분기 누적 대미 로비 금액은 423만달러(약 59억원)로 이미 지난해 전체 로비 금액(433만달러)의 97.7%를 집행했다. 같은 기간 LG는 지난 1998년 이후 최대치에 해당하는 51만달러를 대미 로비에 사용했다. 한화 역시 올 3분기 누적 대미 로비 금액이 309만달러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 현대차 “트럼프 1기보다 불확실성 줄어”
현대차그룹은 상대적으로 다소 느긋한 입장이다. 트럼프 당선인이 외국 기업에 배타적인 기조를 갖고 있지만, 전기차 배터리 제조사를 주력 계열사로 둔 SK와 LG 등에 비해선 상황이 낫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개정해 ‘관세 폭탄’을 내리겠다고 으름장을 놨던 트럼프 1기보다 불확실성이 줄었다는데 안도하는 분위기다.
다만 IRA를 폐기하면 미국 내 전기차 판매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기아의 경우 멕시코 공장에서 프라이드(리오)와 K3 등을 생산해 미국에 수출하는데, 트럼프 당선인은 멕시코산 제품에 높은 관세를 적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IRA와 관세 등 아직 확실하게 방향이 정해진 부분이 없다”면서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물밑에서는 그룹 내 미국통을 중심으로 다양한 시나리오을 설정하고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는 최근 몇 년 간 외교관 출신을 잇따라 영입했다. 지난해 김동조 전 청와대 외신 대변인에 이어 현 정부에서 대통령실 의전 비서관을 역임한 김일범 부사장을 채용했다. 김 부사장의 경우 외교부 북미2과장 등을 거쳐 미국 사정에 정통한 전문가로 꼽힌다. 올해 미국통으로 거론되는 우정엽 전 외교부 외교전략기획관을 전무로 영입한 데 이어, 지난달에는 연원호 전 국립외교원 경제기술안보연구센터장을 글로벌경제안보실장으로 뽑았다.
포스코그룹 역시 미국 대관 조직을 최근 보강했다. 미국 애틀란타에 뒀던 포스코아메리카를 지난해 워싱턴DC로 이전했고, 공화당 인사를 고문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주요 그룹에 비해 미국 대관에 집중하는 컨트롤타워의 힘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올해는 로비 규모도 줄였다. 포스코가 올해 들어 3분기까지 집행한 대미 로비 금액은 39만달러로 파악된다. 이는 2019년 83만달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포스코 관계자는 “대선 승자가 누가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 로비에 공격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공식 출범한 후 어떤 정책을 내놓을지 보면서 대응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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