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동안 ‘폐점런’을 부른 위스키… 과연 그 맛은? [김지호의 위스키디아]
지난 10월 수많은 버번 애호가들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한 제품이 있습니다. 바로 ‘러셀 리저브(Russell’s Reserve) 15년’. 서울 성수동에서 14일 동안 진행됐던 러셀 팝업스토에서는 기쁨과 아쉬움의 탄식이 교차했습니다. 현장은 명백하게 승자와 패자, 두 갈래로 갈렸습니다. 러셀 15년을 구매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승자들은 콧노래를 부르며 매장을 나섰고 패자들은 허탈한 웃음과 함께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습니다.
러셀 15년을 구매할 수 있었던 방법은 총 세 가지. 먼저 매일 선착순 10명에게 주어졌던 러셀 15년 단품(39만9000원) 구매권과 ‘러셀 얼티미트 세트’ 구매권(74만9000원). 얼티미트 세트도 선착순 15명에게 기회가 돌아갔으며 러셀 15년을 포함, 총 5가지 제품을 한꺼번에 구매해야 하는 ‘통합 패키지’였습니다. 미국 현지에서도 러셀 15년 단품 가격이 약 500달러에 거래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가격이었습니다. 다만 야속한 ‘인질극’이라는 비난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선착순 경쟁은 치열했습니다. 첫 번째 대기자는 행사 전날 오전부터 자리를 잡았습니다. 나머지 9명도 점심 전후로 이미 순번이 정해진 상황. 팝업스토어가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최소 20시간. 이들은 캠핑 의자와 방한용품, 긴 시간을 함께 보낼 각종 전자기기와 보조배터리, 간식 등을 챙겨왔습니다.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위스키를 챙겨온 사람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밤새 윙윙대는 모기와의 싸움은 덤.
마지막은 복권 형태의 스크레치 추첨권. 한 제품당 1개의 추첨권을 받을 수 있었고, 동전으로 복권을 긁어서 본인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당첨 확률은 체감상 5퍼센트 미만. 애꿎은 술만 10병 넘게 사고 떠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두 번 긁고 바로 당첨된 사람도 있었습니다. 희비가 엇갈렸죠. 아마 물리적으로 눈물이 찔끔 흘린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대체 러셀 15년이 뭐길래.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와일드 터키의 상위 라인 러셀 리저브
러셀 리저브는 미국 켄터키주에 있는 와일드 터키 증류소의 상위 라인입니다. 매시빌(Mashbill: 곡물 배합률)은 물론 오크통의 숙성고도 공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와일드 터키는 ‘버번의 아버지’라 불리는 지미 러셀의 작품입니다. 지미는 1954년부터 현재까지 70년째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전설적인 마스터 디스틸러입니다. 러셀 리저브는 그의 아들인 에디 러셀이 2001년에 출범한 브랜드입니다.
지미는 8년가량 숙성한 대담하고 직관적인 버번을 선호합니다. 반면 에디는 복합적이고 다양한 맛이 나는 숙성감 있는 버번을 좋아합니다. 에디의 취향이 반영된 브랜드가 러셀인 셈이죠. 러셀 15년은 에디가 매년 여러 차례 맛을 보며 심사숙고 끝에 완성한 제품입니다. 게다가 병 라벨에 지미의 사인까지 표기됐으니, 품질은 어느 정도 검증됐다고 봐야겠죠.
러셀 15년의 매시빌은 옥수수 75%, 호밀 13%, 맥아 보리 12%로 알려져 있습니다. 와일드 터키의 표준 레시피입니다. 러셀 15년에 사용된 배럴(Barrel: 오크통)들은 캠프 넬슨이라는 릭하우스(Rickhouse : 숙성고)에서 나온 제품들입니다. 켄터키강 인근에 있는 숙성고는 시원한 강바람이 솔솔 드는 곳입니다. 이는 오크통 숙성 속도를 늦춰주는 역할을 합니다. 러셀 15년은 약 75%가 15년, 25%가 16년 숙성된 버번으로 구성돼 있다고 합니다. 알코올 도수는 117.2 프루프. 배럴 스트렝스 제품은 아니지만, 누구나 충분히 만족할 만한 도수입니다. 에디가 최종 병입 단계에서 맛의 밸런스를 잡기 위해 물을 살짝 탄 것으로 추정됩니다.
◇러셀 15년의 맛은?
팝업스토어에서 맛볼 수 있는 양은 10밀리로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맛을 보고 시음기를 쓰기에는 다소 부족한 양이었죠. 총 3회에 걸쳐 현장을 방문해 30밀리를 바이알에 채워 맛을 봤습니다.
잔에 코를 대면 검붉은 체리 계열의 과일 향이 도드라집니다. 코끝이 찐득찐득하게 느껴지는 농밀한 바닐라와 캐러멜, 그 끝에 화한 허브와 오렌지껍질을 비틀어 흩뿌린 듯한 시트러스함이 느껴집니다. 한 모금 물었을 때 짭조름한 솔티드 캐러멜과 가벼운 알싸함이 입안을 감싸고, 구운 오렌지에서 체리로 맛이 바쁘게 변합니다. 기름칠한 듯한 미끈한 질감과 타닌감도 느껴집니다. 말미에는 향긋한 찻잎을 입에 머금고 있는 듯한 부드러운 마무리를 보여줍니다. 첫입에 다소 묽게 느껴졌던 질감은 후반부로 갈수록 묵직해지는 편입니다.
‘폐점런’은 14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이뤄졌습니다. 러셀 15년은 올해 들어 입수 난도가 가장 높았던 제품일 것입니다. 수입하는 과정에서 러셀 15년 두 박스가 도난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했으니, 현지에서도 러셀의 인기를 체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고숙성 버번들이 인기몰이하고 있습니다. 에디와 취향이 맞다면 꽤 즐거운 한잔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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