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영의 Energy 지정학] 우크라·발트3국의 ‘헤어질 결심’… 전쟁 전후 러시아와 전력망부터 끊어
이달 중으로 개전(開戰) 1000일을 넘어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긴장감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북한이 러시아를 지원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면서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방어용 무기를 지원할 가능성을 언급하며 대응에 나서고 있다. 우크라이나 측은 우리 정부에 미사일을 요격할 수 있는 방공 무기를 달라는 물밑 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크라이나가 방공 무기를 콕 집어 이야기한 것은 전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지난 3월 이후 우크라이나 전력망에 대규모 공격을 가하고 있다. 전쟁 초기 때도 러시아는 전력망을 타격했지만, 당시는 상대적으로 수리가 쉬운 변전소를 목표로 삼았다. 하지만 올해 여름부터는 한번 파괴됐을 때 단기간에 수리가 곤란한 발전소에 공격력을 집중하고 있다.
방공 미사일이 부족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미사일을 요격하는 데 실패하면서 전체 전력 생산 능력의 50% 이상을 잃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으니 전력이 부족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 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 능력은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 전기 공급이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상황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소련의 일원이었던 우크라이나는 전력망을 러시아와 공유해 왔다. 하지만 러시아는 2014년 크림반도 강제 병합 이후 2015년부터 2년에 걸쳐 우크라이나 전력망에 사이버 공격을 가해 대규모 정전 사태를 일으켰다. 우크라이나뿐 아니라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 발트 3국 역시 각자의 전력망이 사이버 공격을 여러 차례 받았다.
이러자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전력망을 러시아에서 분리해 유럽 전력망과 연결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됐다. 하지만 서로 다른 시스템으로 운영되던 대규모 전력망을 통합하는 것은 단시일에 이뤄내기 어렵다. 많은 비용이 들고 기술적으로도 쉽지 않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대결하는 상황은 모든 것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았다.
2022년 2월 24일 전쟁 발발 4시간 전 우크라이나는 전력망을 러시아에서 분리했다. 2017년부터 추진해온 유럽 전력망 연결을 위한 시험의 하나였고, 72시간 동안 진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시작 4시간 만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시험은 순식간에 실전으로 전환됐다.
당초 2024년 이후로 예정되었던 유럽과 우크라이나의 전력망 연결은 전쟁 발발로 즉각적인 과제가 됐다. 유럽연합(EU)은 모든 절차와 규정을 무시하고 1년에 걸쳐 진행해야 하는 작업을 단 2주 만에 마무리하도록 함으로써 우크라이나의 전력망은 러시아와 분리됐다. 러시아의 공격으로 전력 생산에 큰 타격을 입었지만 유럽 전력망과 통합돼 전력을 수입할 수 있게 되면서 우크라이나는 대규모 정전으로 인한 전력망 붕괴를 모면할 수 있었다.
최근 EU는 우크라이나의 전력 수입 최대 용량을 현재의 1.7GW에서 12월부터 2.1GW로 확대해 겨울철 전력 위기를 넘길 수 있도록 지원에 나섰다. 만약 2022년 우크라이나의 전력망이 유럽과 연결되지 못했다면 우크라이나는 훨씬 험난한 과정을 견뎌야만 했을 것이다.
소련의 일원이었던 발트 3국도 최근 2025년 2월까지 러시아 전력망에서 단절하고 유럽 전력망과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발트 3국은 2004년 나토와 EU에 가입했지만 소련 시대에 구축된 전력망을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 벨라루스, 에스토니아, 러시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등 5국의 머리글자를 따서 BERLL이라고 부르는 이 순환형 전력망은 러시아의 통제 하에 있었다. 가장 먼저 소련에서 독립했던 발트 3국은 전력을 비롯한 에너지 대부분을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어 안보적으로 취약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러시아 역시 약점이 있었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역외 영토로 남아있는 칼리닌그라드 때문이었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 사이의 고립된 위치에 놓여있는 칼리닌그라드는 리투아니아를 통해 전력을 공급받고 있어 러시아는 함부로 발트 3국에 대한 전력 공급을 차단할 수 없었다. 공포의 균형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발트 3국의 나토 가입 이후 송유관 가동을 수시로 중단하는 등 위협적 태도를 보이자 발트 3국 정상들은 2007년 국가 안보를 위해 러시아 전기 의존도를 낮추기로 합의했다.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러시아를 대체할 전력 공급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EU의 지원을 받아 2016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연결하는 500MW 용량의 고압 직류 송전망이 건설됐다. 발트해를 가로질러 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을 연결하는 노르트볼트 해저 케이블망도 완성됐다.
러시아를 대체할 전력망을 확보한 발트 3국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2023년 5월 BERLL과 조속히 분리한다고 선언했다. EU 역시 16억유로에 달하는 망 분리 비용의 75%를 대면서 발트 3국 지원에 나섰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2025년 2월에 발트 3국은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유럽 전력망과 통합하기를 완성할 예정이다. 이러면 칼리닌그라드는 러시아 본토에서 전력을 직접 공급받을 수 없게 된다. 러시아는 발트 3국의 움직임에 대응해 가스 화력발전소 및 석탄 화력발전소를 칼리닌그라드에 긴급히 건설해서 전력을 자급할 수 있도록 했다. 양측 모두 헤어질 결심을 했고 실행에 옮긴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안정적 전력 공급과 전력 시스템 보안이 국가 안보와 직결된다는 것을 우크라이나와 발트 3국은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 전력망은 섬과 같이 고립되어 있어 유사시 외부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만 하는 것이다. 긴장이 높아지는 현 시점에서 우리의 전력망은 유사시 공격 때 얼마나 잘 보호할 수 있는지, 충분한 복구 능력을 확보하고 있는지 챙겨봐야 할 것이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통합의 길 100년’ 유럽 전력망, 최근 북아프리카까지 확대
유럽 전력망은 100년 동안 통합의 길을 걸어왔다. 1921년 프랑스 낭시에서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 밀라노까지 이어지는 송전선이 개통됐다. 1930년대에는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대도시를 연결하는 전력망 구상과 계획이 나오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독일은 네덜란드 등 점령지와 본토를 연결하는 전력망을 구축했다.
1945년 2차대전 종전 이후 전후 복구 시기에 유럽은 미국을 모델로 전력망 연계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서독·프랑스·벨기에 등 8국이 참여한 발전송전조정연합(UCPTE)이 결성되면서 서유럽 국가의 전력망이 통합되기 시작됐다. 이후 남유럽 및 북유럽 등 지역별로 전력망 연계가 본격화됐다. 동유럽은 1963년 상호 연계 전력망 중앙급전기구(CDO/IPS)가 결성되면서 통합 연계망이 구축됐다.
1970년대 오일 쇼크에 대응해 UCPTE는 폴란드, 헝가리 등의 발전소 건설을 지원하고 이곳에서 생산된 전력을 공급받기 시작했다. 외채에 시달리던 동유럽 국가로서는 전력 수출로 외화를 확보할 수 있었고 서유럽 국가들은 환경 오염 논란을 우회할 수 있었다. 이러한 동·서유럽의 전력 협력은 1983년 오스트리아에서 연계 센터가 운용되기 시작하면서 더욱 확대됐다.
냉전 이후 2000년에는 EU와 러시아 사이에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대륙 전력망 구축 논의가 시작됐지만, 러시아 발전소의 안정성 개선을 위한 비용 부담 문제로 결렬되기도 했다. 최근 유럽 전력망은 유럽을 넘어 북아프리카 지역을 연결하는 초광역 전력망 구축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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