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화 어때] 청량 로맨스 보러 갔다 열불이 난 이유, 영화 ‘청설’

백수진 기자 2024. 11. 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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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백수진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99번째 레터는 6일 개봉한 영화 ‘청설’입니다. 동명의 대만 작품을 리메이크한 영화로 오랜만에 보는 20대 배우들의 청춘 로맨스로 기대를 모았죠. 오늘은 시원하고 청량한 로맨스 영화를 기대하고 갔건만, 보고 나서 열불이 난 이유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어쩔 수 없이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반전을 알고 보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청설'에서 여름(노윤서)은 청각장애인 수영 선수인 동생을 돌보며 바쁘게 살아간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저는 대만 원작을 보지 못하고, 여주인공이 수화를 한다는 설정만 알고 영화를 보러 갔는데요.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이렇다 할 스펙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딱히 없어 방황하던 청춘 용준(홍경)이 도시락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 이상형을 만납니다. 수영장에 도시락을 배달하러 갔다가 동생과 수화로 이야기하고 있는 한 여자를 보고 첫눈에 반하죠. 그의 이름은 여름(노윤서), 여동생의 이름은 가을(김민주)입니다. 청각 장애가 있는 수영 선수 가을은 언니의 사랑을 응원하지만, 동생의 뒷바라지가 우선인 여름은 용준에게 거리를 둡니다.

영화는 느리지만 아주 섬세하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을 그립니다. 거의 모든 대사를 수화로 연기한 배우들의 노력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손짓으로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로맨스 영화라니, 신선하고 싱그러웠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는 용준과 여름의 순수함이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한여름의 수영장처럼 시원하고 청량한 영상미도 청춘 로맨스에 잘 어울렸고요.

영화 '청설'의 주인공 용준(홍경)은 수영장에서 만난 여름(노윤서)에게 첫눈에 반한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좋았던 건 여기까지였습니다. 결말에서 용준이 여름을 부모님에게 소개시키는데, 계속 수화를 하던 여름이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름이 청각 장애인인 줄 알았던 용준의 부모님도 “어? 말을 하네?”라며 놀랍니다. 알고 보니 여름은 청각 장애인이 아니었고, 수화를 할 줄 아는 용준이 청각 장애인인 줄 알고 계속 수화로만 대화했다는 것. 개그 프로그램의 실패한 콩트처럼, 관객은 아무도 웃지 않는데 저들끼리 하하호호 웃으며 장면이 전환됩니다.

저는 이 억지스런 반전이 불쾌했습니다. 여름이 장애인으로서 해피 엔딩을 맞이할 순 없었을까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을 응원하던 관객은 배신을 당한 것처럼 찝찝합니다. 내내 장애인을 향한 차별과 장애인의 소외에 대해 말하던 영화가 주인공의 장애 여부로 반전을 만든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영화 '청설'에서 대부분의 대사는 수화로 이뤄진다. 노윤서는 "표정이 수화의 70%를 차지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원작인 대만 영화를 그대로 가져왔을 뿐이라고 하겠지만 원작이 한국에 개봉한 건 2010년, 지금은 2024년입니다. 14년 전 영화를 리메이크하면서 시대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은 건 안일하게 느껴집니다. 동생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다 바치는 언니도 14년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 관객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굳이 윤리적인 잣대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개연성만 놓고 봤을 때도 이상합니다. 용준은 수영장에서 목소리로 여름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이때 여름은 고백을 알아들은 듯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습니다. 용준이 청각장애인인 줄 착각하고 있었다면, 놀라서 펄쩍 뛰며 이때 오해를 풀었어야 하지 않나요? ‘유주얼 서스펙트’급의 반전을 위해 여주인공이 비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끝까지 숨기는데, 도대체 누구를 위한 반전인지 모르겠습니다.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겁니다. 제작진이 의도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한국 콘텐츠에서 장애는 불행, 비장애는 행복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도가 여러 번 반복돼왔습니다. 아이유의 뮤직비디오 ‘러브 윈스 올’은 디스토피아에 사는 청각·시각 장애인인 연인이 환상 속에선 행복한 비장애인으로 묘사돼 논란이 됐었죠. tvN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 역시 휠체어를 탔던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다시 걸을 수 있게 되는 판타지를 그려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장애를 묘사할 때 비슷한 패턴이 반복된다는 건 한국 사회의 부족한 감수성을 드러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미국 타임지는 ‘선재 업고 튀어’를 “올해 최고의 K-드라마”로 뽑으면서도 “장애를 해피엔딩을 위해 ‘극복’하거나 ‘치료’해야 할 장애물로 묘사한 것은 아쉽다””솔의 해피엔딩에 장애가 포함됐다면 획기적인 일이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청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준과 여름의 해피 엔딩에 장애가 포함됐다면, 이 영화는 훨씬 아름다워졌을 겁니다.

세 번 연속 ‘비추’ 레터를 보내게 돼서 송구스럽네요. 그래도 11월엔 ‘글래디에이터2′’위키드’’모아나2′까지 대작들이 줄줄이 개봉을 앞두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마 100번째 레터엔 쌀쌀한 날씨에 움츠러든 마음을 녹여줄 아름다운 영화를 소개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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