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플라자] “이걸… 학폭으로 봐야 하나요?”
어릴 적 난 못 말리는 왈가닥이었다. 아이스께끼를 하거나 고무줄을 끊고 달아나는 짓궂은 남자애가 있으면, 우당탕 쫓아가 응징(?)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주먹다짐을 벌이다 남자애를 울린 적도 있었다.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온 날이면, 엄마는 김치전을 소쿠리 가득 구워 이웃집 문을 두드렸다.
“미안해서 어떡해요, 내 이놈의 기집애를 그냥...”
“아이고, 애들끼리 장난친 건데요, 뭘.”
엄마들은 자식들 등을 떠밀어 화해하게 하고, 자기들은 문간에 서서 한참 동안 수다를 떨곤 했다. 집에 올 때는 그릇에 떡이며 과일이 수북이 담겨 있었다.
2020년부터 전국 교육청에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이른바 ‘학폭위’가 설치되면서, 학폭은 이제 교내 문제에 그치지 않게 됐다. 피해 학생과 그 보호자가 종결에 동의하는 경미한 사건에 한해서만 교장이 종결할 수 있고, 그 외에는 전부 사건 조사, 학폭위 심의를 거쳐 조치결정을 내려야 한다. 학폭위의 권한에 따라 가해 학생을 강제 전학시키거나 퇴학시킬 수도 있고, 사회봉사 이상의 처분은 곧바로 생활기록부에도 남게 된다.
새롭게 학부모 세대로 떠오른 30대는 학폭에 연루된 자녀의 일을 절대 가볍게 넘기지 않는다. 강남 학폭위는 양쪽 변호사가 기본이라든가, 이쪽에서 검사 출신 변호사를 선임하면 저쪽에서는 대법관 출신을 데려온다는 말이 농담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과를 하면 그게 불리한 증거가 되니까 절대 사과하지 말라’는 조언도 인터넷 카페에 돌아다니기도 한다.
이렇게 과열된 상황에서, 지역 학폭위에는 사건이 어마어마하게 밀려든다. 학폭위는 전현직 교사, 학부모, 경찰, 심리상담가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되는데, 법률 지식이 있는 전문 위원도 필요하기에 나 또한 지역 학폭위에 출석하고 있다. 학기 중은 물론이고 방학 중에도 하루에 두세 건씩 심의가 잡힌다. 열 개 넘게 구성해 놓은 소위원회만으로 감당이 안 되어 특별 소위가 소집될 때도 있다. 그런데 이 많은 사건 중, 진짜 심의가 필요한 사건은 일부에 불과하다.
“이걸...학폭으로 봐야 하나요?”
초등학교 1학년 남자아이가 운동장에서 개미를 밟아 죽이는 친구를 보고, 하지 말라며 밀쳤다가 친구가 넘어졌다. 넘어진 아이가 외상을 입어 다친 곳은 없었지만, 부모는 “아이가 트라우마가 생겨 심리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며 심의 회부를 고집했다. 여덟 살 먹은 ‘가해 학생’이 심의실에 들어오는데 걸음걸이가 아장아장, 보는데 한숨이 푹 나온다. 일곱 살이든 여덟 살이든 친구를 민 것은 법률상 폭행이 맞으니 ‘학폭 아님’ 처분은 할 수 없고, ‘조치 없음’과 ‘서면사과’ 처분 중 고민하던 위원들은 ‘서면사과’ 처분을 내린다. 자필 사과문을 써서 내라는 가장 약한 처분이다.
학폭을 체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제도가 생긴 것은 너무 다행이다. 그러나 사건의 경중이나 성격을 따지지 않고 모두 똑같은 절차를 밟다 보니, 사회적으로 엄청난 인력과 자원의 낭비가 초래되고 있다. 학폭 조사관도, 학폭 간사도, 심의위원들도 과중한 업무량에 시달리다 보니 정작 중요한 사건이 와도 충분한 공을 들이지 못한다. 금원 갈취나 몰카 촬영 같은 심각한 학폭에 할애해야 할 시간을, 누가 누구만 빼고 생일파티에 초대했다든가, 누가 누구를 노려보고 지나갔다든가 하는 말다툼에 휘말리는 데 보내게 되는 것이다. 일부 M세대 학부모들은 자녀를 둘러싼 사소한 손해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이렇다보니 정작 강력한 보호를 받아야 할 학폭 피해 학생과 그 가족들은 ‘형식적인 심의만 받은 것 같다’고 서운함을 토로한다. 학폭 조치 결과를 입시에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것, 소급해서 반영하는 것, 다 좋다. 그러나 학폭위에 더 많은 권한을 주기 전에, 그 체계를 제대로 정비하고 전문성을 강화하는 게 먼저다. 이대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선택과 집중’의 개념이 학폭 해결에도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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