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사 파업 비판 보도 정체불명 '독자제공' 사진? 알고보니 현대차

김예리 기자 2024. 11. 6. 22:31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현대차·기아 양재사옥 앞 집회 사진 일제히 '악질 현대자본' 흐림 처리
파업 중단 주문하는 자료도 제공 "곳간 지키려 가당치 않은 언론플레이"

[미디어오늘 김예리 기자]

▲언론에'독자 제공' 출처로 표기된현대트랜시스 노동자들의 현대차·기아 양재 사옥 앞 집회 사진. 사진엔'악질 현대자본 박살, 경영진 무능함 규탄' 무대 구호가 흐림처리돼 있다.

현대차·기아가 핵심 부품 계열사인 현대트랜시스 노동자들의 파업 중단을 주문하는 보도자료와 사진을 기자들에 배포하면서 익명을 요청한 것으로 파악됐다. 익명의 '관계자'와 '전문가' 코멘트 자료를 제공하고 사진은 '독자 제공' 표기하도록 했다.

지난 3~5일, 현대트랜시스 노동자들의 파업 집회를 다룬 언론 보도에 일제히 사진 한 장이 실렸다. 민주노총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트랜시스서산지회가 지난달 28일 원청 현대차·기아 양재 사옥을 찾아 집회하는 대오를 뒤편에서 찍은 사진이다.

현대트랜시스는 서산 지곡공장에서 현대·기아에 납품하는 변속기와 액슬, 시트 등을 생산한다. 현대트랜시스서산지회는 올해 임금·단체교섭이 난항을 겪으며 지난달 초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28일엔 원청 현대차기아 사옥을 찾아 집회를 열었다. 임단협 교착 배경에 완성차 이익 몰아주기 구조가 있다고 항의하면서다. 연합뉴스와 뉴시스, 뉴스1, 서울신문, 조선일보, 데일리안 등 다수 경제지와 종합지, 뉴스통신사가 보도했다.

▲ 권영국 정의당 대표가 지난달 28일 현대차 사옥 앞에서 열린 금속노조 현대트랜시스지회 집회에서 지지 발언하고 있다. 언론에 흐림처리된 글자'악질 현대자본 박살! 경영진 무능함 규탄!'이 나타나 있다. 사진=금속노조

그런데 보도 사진을 보면, 집회 무대에 적힌 '악질 현대자본 박살, 경영진 무능함 규탄'이라는 문구가 흐림 처리됐다. 10개 안팎의 언론사가 보도한 사진들이 모두 동일하게 가공됐다. 언론사들은 사진의 출처를 '독자 제공'이라 밝혔다. 기사는 노조가 파업을 연장하는 데에 생산 피해 등을 이유로 부정적으로 그리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제목은 '현대차그룹 생산차질 우려' '노조 파업 지속…양측 피해 키운다' 등이다.

금속노조는 5일 낸 성명에서 사진의 출처에 의혹을 제기했다. “'경영진 무능' 문구를 삭제한 집회 사진이 언론에 도배됐다”며 “독자 한 명이 이 많은 언론에 같은 사진을, 같은 논조로 제보한 건가?”라고 물었다. 그러면서 “경영진 비판에 불쾌감을 느끼고, 언론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단 하나밖에 없다. 바로 양재동(현대차·기아)”이라고 했다.

사진 제공, 일반 독자도 현대트랜시스도 아닌 현대차 홍보

실제 사진 제공자는 일반 독자나 현대트랜시스가 아닌 현대차·기아였다. 취재에 따르면 현대차·기아 커뮤니케이션센터는 지난 1일 산업부 등 기자들에게 이메일로 해당 사진을 배포하면서 “사진 출처는 독자 제공입니다”라고 밝혔다. 무대 문구가 흐림처리된 사진이다.

현대차·기아는 현대트랜시스지회 파업을 비판하는 취지의 참고자료도 함께 배포했다. '현대트랜시스 노조 한 달 가까이 파업 강행 임금손실 눈덩이'란 제목의 자료는 부제에서 “노조, 다수 근로자의 실리와 임금손실 축소 위해 파업 철회해야”라는 '여론'을 강조했다.

현대차·기아는 3쪽에 걸쳐 “현대트랜시스 노조가 작년 영업이익의 2배에 달하는 과도한 성과급을 요구하며 시작한 파업이 한달 가까이 강행되고 있음”이라며 “파업 장기화로 근로자들의 불만도 쏟아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익명의 △법조계 관계자 △산업계 관계자 △대다수 전문가와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등을 인용 출처로 주장을 전했다.

▲현대차·기아 홍보담당자가 기자들에 보낸 보도 참고자료 갈무리.

자료엔 익명의 '관계자'들이 “파업에 동참하지 않은 선량한 근로자도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회사는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지킬 수밖에 없다”, “파업에 대한 임금손실을 보전하면 업무상 배임죄까지 적용될 수 있다” 등 발언을 했다고 적혔다. “대다수 전문가가 근로자 실리와 임금손실 중단을 고려해 파업을 중단할 퇴로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함”이라고도 했다.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에 “노조 집행부에 대한 비판이 담긴 게시글”들이 지속적으로 올라온다고도 했다.

이들 표현은 언론 보도에서 다수 확인됐다. 연합뉴스와 동아일보, 세계일보, 한국경제, 매일경제, 팍스경제TV, 프라임경제 등 기사에서 문장 또는 주요 구절 단위로 자료와 겹치는 대목이 여럿 발견된다. 특히 익명 커뮤니티에서 집행부를 향한 불만이 올라왔다는 주장, “노조가 일단 파업 중단하고 퇴로를 마련하라”는 익명의 전문가 조언이 자주 언급됐다.

금속노조는 성명에서 “양재동 곳간 지키려 가당치 않은 언론플레이를 벌이는가”라며 “양재동은 본질을 알라. 쟁의의 본질은 노동자에 희생만 강요하는 자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완성차 영업이익은 10%에 육박하는데 현대트랜시스 영업이익은 고작 1% 수준, 초과이익은 대부분이 완성차로 쏠린다”며 “노동자들은 현대트랜시스 미션(변속기) 단가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팔린다는 사실을 알고 양재 본사에 문제 개선을 요구했다”고 했다.

결국 현대트랜시스로부턴 개선책이 나오지 않아 양재 본사를 찾았다는 설명이다. 금속노조는 “현대트랜시스뿐만 아니라 현대제철, 현대위아, 현대엠시트 등에서도 교섭이 마무리되고 있지 않다. 완성차를 제외하고 부품사, 계열사의 목만 더 죄는 상황”이라며 “조합원 분노는 사업장 울타리를 넘어 모이고 양재동을 향할 것”이라고 했다.

미디어오늘은 6일 현대차·기아 측에 △금속노조 성명에 대한 반론 △별도 법인 파업에 중단 요구를 담은 보도자료를 배포한 이유 △기자들에게 사진 출처를 '독자 제공' 표기하도록 요구하거나 흐림 처리한 이유를 물었다. 현대차 홍보담당자는 “내 담당이 아니다”라며 답하지 않았다. 이 담당자가 연결한 또다른 담당자는 전화와 문자메시지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Copyright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