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랫말·제목 ‘영어 물결’…시대흐름 맞춘 유행일까, 몰입 방해일까[한성우의 말과 글의 풍경]
멋진 외모와 화려한 춤에도 가사·가수 이름 ‘생경’…노래 집중 어려워
세계무대 진출 이유 확산…맥락 상관없이 습관적으로 붙인 말 상당수
음악 프로 50곡 가사 중 절반만 우리말…마뜩잖아도 ‘유행가’란 그런 것
‘아파트’란 노래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라니 반가운 마음에 들어본다. 그런데 노래 제목이 ‘APT.’여서 살짝 의심이 가더니 가수의 이름을 보니 로제(ROSE)와 브루노 마스(Bruno Mars)여서 속았다는 느낌이 확 든다. 노래는 “띵동띵동”하는 초인종 소리로 시작되어야 하는데 젊은 친구들의 술자리 게임에서 반복해서 들리던 가사, 가락, 장단으로 시작된다. 그렇다. “별빛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 바람 부는 갈대숲을 지난” 그곳이 모두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린 지금, 노래가 나온 지 40년이 흐른 지금에 그 노래가 다시 유행할 리가 없다. 지금은 K팝이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는 시대, 성과 이름을 합쳐 세 음절로 된 이름의 가수가 ‘순우리말’로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 시대는 아니다. 세계적인 가수마저 한국식으로 ‘아파트’를 발음하며 우리 가수와 함께 노래를 부르는 시대다.
내친김에 ‘요즘 노래’의 최전선에 가보고자 두 시간 동안의 줄서기와 바닥 대기를 견디며 매주 진행되는 음악 순위 프로그램의 생방송에 참여해본다. 아무리 둘러봐도 노랗고 빨간 머리는 있어도 흰머리 방청객은 없어 주눅이 들던 차에 뒤늦게 합류한 ‘제이디 일(JD1)’을 응원하는 또래 여성들 덕에 마음이 놓인다. 한 시간이 조금 넘는 방송 시간인데 도무지 집중이 안 된다. 점잖은 외모의 가수가 부르는 느긋한 장단에 유려한 가락을 기대한 것은 아니니 젊은 가수들의 예쁘고 멋진 외모와 화려한 춤에 반할 만도 한데 노래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가사는커녕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의 이름조차도 잘 모르겠다. 왜 이 풍경에 몰입하지 못하는 것일까?
가요 100년, 2만6000여 곡의 결론
‘대중가요’ 혹은 ‘유행가’라고 분류되는 노래가 이 땅에서 불리기 시작한 지 100여년, 노래방에서 인기를 끄는 노래를 중심으로 2만6000여곡을 분석해 책을 펴낸 기억을 떠올리며 자료를 뒤적여본다. 1923년 박채선과 이류색의 ‘이 풍진 세월’부터 2016년 방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FIRE)’까지의 노래를 분석해보면 모든 노래는 ‘내가 너에게 들려주는 사랑 고백’이었다. 제목이든, 가사든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나’와 ‘너’이고 일반명사는 ‘사랑’이니 우리의 대중가요는 결국 ‘사랑타령’이다.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명사는 ‘사람’이고, ‘사랑’은 빈도 순으로 12위인 데 반해 노랫말 속에서는 압도적인 1위이니 그리 기억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노래가 된 시’가 있었고 ‘시가 된 노래’도 있었다. 가장 한국적인 정서와 운율을 담은 김소월의 시, 그리고 서정주, 박두진, 정지용, 고은, 정호승의 시가 노래로 만들어져 선율과 함께 노랫말 자체가 음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용필이 부른 ‘슬픈 베아트리체’와 이소라가 부른 ‘바람이 분다’는 그 어떤 시보다도 더 시답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노래는 ‘입으로 부르는 것’이고 입에서 나오는 것은 곧 ‘말’이니 모든 노래는 가락 및 장단과 함께 노랫말 자체를 부르는 이나 듣는 이 모두가 중시했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 가락과 장단은 기억나지 않더라도 노랫말은 남아서 흥얼거리고 곱씹을 수 있었다.
그런데 노래가 길어지기 시작했다. 시조 정도 길이의 가사로 절을 바꾸어 2~3절까지 부르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절의 구분이 없어지더니 마냥 길어졌다. 맥락을 알 수 없는 외국어, 특히 영어가 끼어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후렴구가 반복됐고 젊은 아이들이 떼지어 나와서 노래를 부르는 일이 잦아졌다. 노래는 귀로 듣는 소리였는데 어느덧 눈으로 보는 춤이 더 중요해진 듯했고 젊은 아이들은 춤을 추느라 헐떡이다 보니 노랫말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게 되었다. 노랫말은 길어졌지만 맥락이 모호한 가사와 알 수 없는 외국어 추임새가 덧붙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그래서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 노래가 돼버렸다.
“진짜 옛날 노래는 노래에 충실했던 것 같아요. 가사도 쑥쑥 들어오고 요즘 노래는 노래가 노랜지.” 40년 전 ‘아파트’의 뮤직비디오에 달린 댓글이다. 제이디 일, 아니 제이디 원이 아닌 그의 본명 정동원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많은 이들이 공감할 만한 댓글이다. 그들이 젊었을 때 즐겨 들었던, 그래서 지금도 가끔씩 가슴속에서 꺼내어 듣는 노래들은 노래에 충실했고 가사도 쑥쑥 들어왔다. 그런데 요즘 노래는 노래도 아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2024년 10월 넷째 주의 ‘요즘 가수’
요즘 노래는 노래도 아니라고 하려면 ‘느낌적 느낌’이 아닌 구체적 자료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요즘 노래’를 제대로 분석해서 가요 100년 혹은 예전의 ‘진짜 노래’와 비교해 보아야 한다. ‘요즘’을 어떻게 설정할지, 그 기간에 나온 어떤 노래를 대상으로 할지 알 수 없으니 생방송을 지켜봤던 그 프로그램에서 선정한 순위 50위에 드는 노래만을 대상으로 분석해본다. 표본이 작아 정확한 비교는 어렵겠지만 ‘요즘’의 모습을 훑어보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이 50곡은 모두 우리 노래인가? ‘우리 노래’에 대한 정의는 다양할 수 있지만 ‘우리 가수’가 부른 노래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 조건 중 하나이다. 그런데 ‘QWER’부터 ‘어반 자카파’까지, 나아가 ‘HYNN(박혜원)’까지 부른 이의 이름만 보면 자그마치 36곡은 우리 노래가 아니다. ‘QWER’은 어떻게 읽어야 하고, ‘어반 자카파’는 무슨 뜻인가? ‘로이 킴’이야 그렇다 쳐도 ‘백현’이란 이름이 분명히 있는데 굳이 ‘BAEKHYUN’을 붙여 놓은 이유는 무엇일까? 어린 나이에 그토록 구성지게 노래를 불러 아저씨, 아줌마의 가슴을 울린 정동원마저 ‘JD1’이란 알 수 없는 이름으로 배신하다니 통탄할 노릇이다. 단 한 주이기는 하지만 요즘 노래 50곡 중 단 14곡만이 우리 노래이다.
아니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란 가사로 사랑 고백을 해본 이들이라면, 이 노래를 부른 듀엣의 이름이 개구리와 두꺼비란 뜻의 이탈리아어 ‘라나에로스포(Lana Et Rospo)’였다는 것을 아는 이들이라면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록 음악의 전설 신중현은 ‘에드 훠(Add 4)’라는 이름으로 활동했고, ‘원더걸스(Wonder Girls)’ 이전에는 ‘토끼소녀’가 ‘바니걸스(Bonny Girls)’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록 그룹의 이름은 왠지 ‘활주로’보다는 ‘런웨이(Runway)’가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이후에도 수없이 많은 이들이 서양식 이름을 쓰면서 활동했던 가수들에 열광했다면 요즘 가수의 이름을 꼬집으며 비판할 자격이 없다.
이들의 이름을 최초의 K팝 그룹 ‘김시스터즈(The Kim Sisters)’와 비교해보라. 과거의 서양식 이름 중 상당수는 서양을 동경하거나 흉내 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시스터즈란 이름은 미국 무대에서 활동하기 위해서 필연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많은 가수들이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자 하고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K팝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을 반가워하는 이라면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자 하는 이들인데 이름으로 시비를 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 이름 뒤에 로마자 이름을 붙이는 것, 본래의 이름을 외국인이 발음하기 편하게 살짝 바꾸는 것 모두 ‘우리 노래’를 한국인만의 노래가 아닌 세계인을 위한 노래로 만들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2024년 10월 넷째 주의 ‘요즘 노래’
제목인들 다를까? 50곡의 제목을 띄어쓰기 단위인 어절별로 단순하게 비교해 보아도 90어절 중 42어절이 외국어이고 38어절은 아예 로마자로만 표기해 놓았다. ‘Mantra’는 ‘주문’이란 뜻의 인도어가 영어로 차용된 것이니 웬만해서는 알 수 없다. ‘GGUM’은 ‘껌’이라는데 ‘Gum’이 토착화하다 못해 표기까지 바뀌었고, ‘NA’는 1인칭 ‘나’일 텐데 이리 써놓으니 신기할 따름이다. 고양이 소리를 가리키는 ‘MEOW’를 부르는 그룹 이름은 ‘MEOVV’이니 제목과 가수가 정신없이 헷갈리고 그 뜻도 헷갈린다. 이쯤 되면 이 제목들을 열심히 뜯어보고 찾아볼 사람만 들으라는 것이다.
맞다. 정동원이 JD1이란 댄스 가수 ‘부캐’로 변신했어도 ‘책임져’라는 노래 제목에 안심하는 이들, 그의 공연 영상에 “찢었다”라는 댓글을 달면서 닉네임은 ‘천송이만송이’를 쓰는 이들을 위한 노래는 아니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을 살면서도 저마다 삶의 영역이 다르듯이 이들을 위해서는 ‘미스’와 ‘미스터’들, 나아가 일본의 가수들까지 나와 옛노래를 들려주는 수없이 많은 프로그램이 있다. 반면에 콘서트장뿐 아니라 가수들의 일상까지 따라다니며 열광하고 영상과 자료를 찾아보는 이들도 있는데 ‘요즘 노래’는 이들을 위한 노래이다. 물론 ‘이들’은 한반도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퍼져 있고 그들에게는 이런 제목이 더 편하다.
성인가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당신 편’이 있고, 발라드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고마웠어 내게 와줘서’란 노래가 있다. ‘록/메탈’로 분류되는 ‘내 이름 맑음’과 ‘청춘만화’라는 편안한 제목의 노래가 있고, ‘포크/블루스’로 분류되는 ‘첫사랑’이 있다. 결국 ‘요즘 노래’ 모두가 댄스와 힙합은 아니니 여전히 찾아서 들을 수 있는 노래가 있는 셈이다. 대중가요의 절대적 가치 중 하나는 상업성, 팔리는 노래를 만들어야 하는데 음반과 음원을 사고 콘서트장을 찾아서 돈을 쓰는 이들을 위한 노래가 많은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자신이 즐길 수 있는 노래와 프로그램이 충분히 있는 상황에서 듣지도, 돈을 쓰지도 않을 노래를 욕해서는 안 된다.
가사는 어떤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단어는 역시 ‘나’와 ‘너’이고, 명사 1823개 중 가장 높은 빈도를 보이는 것은 63회가 나타나는 ‘사랑’이다. 이는 요즘 노래 역시 ‘내가 너에게 들려주는 사랑 고백’ 혹은 ‘사랑타령’이란 사실을 입증해준다. 명사 중 그다음으로 많이 등장하는 것이 ‘아파트’인데 이는 ‘APT.’란 노래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즘 노래의 전반적 특성도 잘 보여준다. ‘아파트’는 일반명사이기는 하지만 이 노래에서는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게임의 구호일 뿐이다. 요즘 노래의 가사가 길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의미 없는 단어의 반복이 많다. 노래가 길어졌지만 특별한 의미를 담기보다는 화려한 무대를 채우기 위해 ‘말’이 아닌 ‘소리’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많은 이들이 걱정스레 혹은 혀를 끌끌 차며 바라보는 영어 가사는 1만2000여 어절 중 5만5000여 어절이나 된다. 이쯤 되면 반만 우리말인 셈이다. 이 노래를 듣는 이들이 반은 영어로 말해도 통할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이러다 이들은 우리말을 잊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염려할 일이 아니다. 영어 역시 ‘I, you, me’ 등이 압도적으로 많고 대부분이 중학교 수준의 기초적인 단어이다. 이런 단어로 구성된 영어 문장조차도 맥락과는 전혀 상관없이 습관적으로 붙는 말들이 상당수다. 고려가요 ‘가시리’를 부를 때 “위 증즐가 太平聖代”를, ‘청산별곡’을 부를 때 “얄리얄리얄라셩”을 의미 없는 후렴구로 붙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100년간의 대중가요 전체에 쓰인 영어 노랫말을 분석해보면 100개 단어가 가사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 노래에 영어가 들어와봤자 의미 없는 후렴구 수준 혹은 뻔한 말이 양념 수준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이고 요즘 노래도 전혀 다르지 않다.
젊을 때 노래를 많이 듣고 나이가 들면 ‘옛날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니라 ‘젊었을 때’의 노래를 듣는 것이다. 옛날에는 요즘 노래를 듣다가 요즘에는 옛날 노래를 듣는다. 지금 요즘 노래를 듣는 이들은 세월이 흐르면 옛날 노래를 들으며 미래의 요즘 노래를 탓할 것이다. 노래는 그렇게 세월 따라 흐르기 때문에 ‘유행가(流行歌)’라고 말한다. 지금의 흐름이 탐탁지 않은 이들이 많겠지만 모두가 함께 만들고 들으면서 여기까지 흘러온 것이고 또 앞으로 흘러갈 것이다. 그리고 그 노래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40여년 전에 만든 ‘아파트’ 뮤직비디오를 보면 멋쟁이 오빠 윤수일이 ‘APT’란 글자가 커다랗게 쓰인 티셔츠를 입고 노래를 부른다. 2024년에 만든 ‘APT.’ 뮤비를 보면 로제와 브루노 마스가 끊임없이 한국식 발음으로 ‘아파트’를 외친다. 결코 우연이 아닌 이 장면은 우리 대중가요의 역사와 유유한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필자 한성우
한국어의 방언과 말소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이다. 삶 속의 말과 글을 쉽게 이해하고 깊게 생각하도록 돕는다. 첼로를 사랑하는 목수로서 또 하나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해 박사까지 마쳤다.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국어규범정비위원회 위원이며, 한국방언학회 수석부회장이다. 문화방송(MBC) 우리말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방언정담> <우리 음식의 언어> <노래의 언어> <문화어 수업> <말의 주인이 되는 시간> <꿈을 찍는 공방> <방언, 이 땅의 모든 말> 등의 책을 썼다.
한성우 국어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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