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망한 희생 없게 제대로 알고 불에 맞서야죠”

박용필 기자 2024. 11. 6. 20:5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소방의 역사’ 책으로 펴낸 영종소방서 송병준 소방위
송병준씨(가운데)가 2022년 충남 공주 중앙소방학교 화재 교관 재직 당시 교육생들을 대상으로 화재성상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본인 제공

‘19세기 미국에서는 수류탄을 던져 불을 껐다’ ‘소방차의 원조는 대형 주사기였다’.

최근 발간된 <소방의 역사>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1884년 미국 시카고에서 특허 출원된 ‘핸드그레네이드 파이어 익스팅귀셔’는 이름처럼 ‘수류탄’ 모양을 한 유리병 안에 물과 소금, 소화약제가 들어 있는 투척식 소화기였다. 불길을 향해 던지면 유리병이 깨지면서 소화약제가 포함된 수증기가 불을 끄는 원리였다. ‘아이도 불을 끌 수 있다’는 게 출원 취지 중 하나였다.

런던 시민 8명 중 7명이 집을 잃었던 런던 대화재 당시, 열기 때문에 일명 ‘양동이 부대’가 불길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자 이후 거대한 주사기 형태의 소방펌프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펌프를 증기기관, 내연기관에 얹으면서 소방차가 출현했다.

책은 불에 맞선 인간의 역사를 다룬다. 전 세계에서 일어난 주요 화재와 그로 인해 나온 발명품들을 소개한다. 저자는 현직 소방관이다. 지난달 22일 인천소방본부 영종소방서에 근무하는 송병준 소방위(45)의 얘기를 들어봤다. “사다리차는 1800년대 화재로부터 ‘재산’을 보호하는 데 치중하던 영국 사설 소방대가 인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비판에서 나온 발명품이었어요. 한국도 대연각호텔 화재로 166명이 사망하자 7층 이상 높이에 도달할 수 있는 사다리차를 본격 도입했죠.”

인천소방본부 영종소방서 소속 송병준 소방위
최후 보루 방화문, 민원 하면 닫고
경보기·에어매트 등 안전 장비는
가격이 낙찰 최우선 조건인 현실
생명 위해 불편과 비용 감수해야

그는 지난 3년간 평일에는 퇴근 후 1~2시간, 주말이나 교대근무 비번일 때는 온종일 자료 수집에 매달렸다. 1890년 이후 출원된 전 세계 특허를 열람할 수 있는 ‘구글 특허’, 위키백과 영문판의 ‘참조 문헌’, 전 세계 주요 논문을 볼 수 있는 ‘구글 스칼러’ 등을 매일 뒤졌다. 아마존과 이베이에서 돈을 주고 산 논문도 상당수다.

“소방학교에서 교수 요원으로 근무할 때 내부 교재가 마땅한 게 없었어요. 시중에 나온 수험서조차 대부분 규격이나 요건, 규제 등 법적 기준 위주로만 구성돼 있거든요. 이 장비나 제도가 도대체 왜 출현했고, 왜 필요한지에 대해 본질적인 얘기를 해주는 책이 하나쯤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3년을 버틴 건 단지 ‘교재 확보’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실효성’ 아닌 ‘합법이냐 불법이냐’가 장비나 제도 운용의 기준이 되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한 아파트에 추락 직전의 주민을 구하러 출동한 적이 있었어요. 관리소에 배치된 에어매트는 곰팡이와 구멍투성이였고 펼 곳도 마땅치 않았어요. 추락 예상 지점은 조경을 위한 나무들이 차지하고 있었거든요. 법은 ‘공동주택에 에어매트를 비치해야 한다’고만 규정합니다. 시공자는 물론 안전관리자나 감독관청도 그 규정을 지키는 데에만 충실했던 셈이죠.”

단지 ‘에어매트’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발생한 화재들에서도 경보기나 스프링클러가 꺼져 있었던 경우가 종종 보도된다. 건물 시공 시 경보기 등은 ‘제 역할을 할까?’보단, ‘최소한의 법적 기준을 충족하는 가격 경쟁력’이 낙찰의 최우선 조건이 되곤 한다. 업체는 단가를 맞추기 위해 저가 부품을 사용하고 이는 잦은 오작동의 원인이 된다.

“오작동이 계속되면 민원이 나오죠. 그럼 관리자가 장치를 아예 꺼버리는 경우도 생겨요. ‘실효성’이 아닌 ‘합법 여부’와 ‘채산성’이 기준이 되면 관련 기술 개발도 뒷전이 될 수밖에 없죠. 설치업체가 2~3년 뒤 없어지기도 해요. 유지보수조차 어려워지는 상황도 드물지 않은 거죠.”

‘내부 교재용’으로 쓴 책을 일반 도서로 낸 이유에 대해 그는 “시공자나 안전관리자, 소방관만 바뀐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방화문을 왜 닫아놓느냐’는 민원인, 계단에 자전거를 적치해놓는 일부 주민분들도 생각을 달리하실 필요가 있어요. 화재 사망자 중 80%는 연기 때문에 질식사해요. 방화문은 유일한 탈출로인 계단을 연기로부터 방어해주는 최후의 보루죠. 불이 나 전기가 끊기면 계단은 암흑천지가 됩니다. 달려 내려오다가 자전거에 걸려 넘어지면 크게 다치거나 사망할 수도 있어요.”

그는 방화문이나 비상구, 감지기나 경보기 등이 ‘피를 먹고 자랐다’고 했다. “책을 쓰면서 느낀 점은 안전 장비와 제도는 무수한 비극과 희생을 대가로 세상에 나왔다는 거예요. 현장에서 불에 타 돌아가신 분들을 보면 황망하기 그지없어요. 이런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어디 있나 싶어요. 그런 희생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온 것들이 제 역할을 하려면 ‘안전을 위해 불편과 비용을 어느 정도 감수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박용필 기자 phil@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