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클라이밍 | 천종원ㆍ이승범] 한국에서 가장 센 바위와 월드챔피언의 한 판 승부

"북한산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어려운 볼더가 있어요. 손상원 선배 말고는 아무도 오른 적 없는 걸로 알고 있어요. 거기서 촬영했으면 해요. 꼭 오르고 싶거든요."
천종원(아디다스 클라이밍팀)은 바위를 지목했다. 북한산성계곡 '럭키(V13)'였다. 북한산성계곡은 한때 '볼더링 타운'이라 불렸다. 2007년부터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 클라이머들이 개척한 볼더 70여 개가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어려운 난이도인 V13의 볼더가 있다. 외국인 볼더들이 개척했으나 미등으로 남아 있던 걸, 2010년 손상원이 초등하고 '럭키(Lucky)'라 이름 붙였다. 손상원 이후 아무도 재등한 이가 없었다.
손상원은 2013년 스페인에서 5.15급 루트인 '라 람블라'를 올라, 한국에 처음으로 5.15급 등반 시대를 열었다. 국내 최정상 클라이머로 불리기에 모자람 없는 것이다. 손상원만 오른 루트에 이제 막 성인이 된 천종원이 도전장을 냈다.
천종원은 볼더링의 떠오르는 샛별을 넘어 새로운 최강자다. 지난 6월 중국 하이양에서 열린 국제스포츠클라이밍연맹(IFSC) 클라이밍 월드컵 볼더링 부분에서 우승했다. 이번 시즌 첫 월드컵 대회에서 6위에 오른 데 이어 세 번째 대회에서 준우승했으며, 여세를 몰아 네 번째인 중국 대회에서 우승한 것이다. 8월 독일에서 이번 시즌 마지막 월드컵 대회를 남겨두고 있으며, 현재 올 시즌 볼더링 세계랭킹 1위다.


단적으로 해석하면 2015년 현재 세계에서 볼더링을 가장 잘하는 선수다. 물론 경기 등반과 자연 바위는 홀드의 질감부터 많은 차이가 있다. 때문에 볼더링 경기의 1인자인 천종원이 '럭키'에 도전한다는 건, 자연 바위에서도 최강임을 증명하겠다는 의미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어려운 바위와 최강 클라이머의 한판 승부가 북한산에서 열린 것이다. 일종의 타이틀매치인 셈이다.
어제까지 비가 내렸다. 오늘은 맑지만 30℃에 이르는 더운 날씨다. 고난도 볼더링은 미세한 조건들이 결과를 좌우한다. 비가 왔고, 습하고 더운 날씨는 V13 루트를 오르기에 악조건이다.
"나는 암장의 얼굴 마담"
천종원은 산책 나온 동네 청년 같다. 밝고 편안하다. 물이나 간식도 따로 준비해 오지 않았고 심지어 홀드를 털어내는 솔도 두고 와서, 임시방편으로 칫솔을 샀을 정도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활시위를 당길 때처럼 그의 안에 팽팽히 당겨진 긴장이 있다.
함께 온 이는 이승범, 열일곱 살 고등학교 1학년이다. 천종원의 한양공고 산악부 후배이며, 실내암장에서 함께 운동하고 있다. 천종원 선수의 부모는 지난 4월 서울 강남구 논현동 두산빌딩 지하에 비블럭(B-bloc) 실내암장을 열었다. 모친이 암장을 운영하고 천 선수는 암장에서 훈련에 전념하고 있다. 코치 역할도 하냐고 묻자 "저는 암장의 얼굴 마담"이라고 돌직구로 답한다.

크래쉬 패드를 멘 두 소년이 북한산성계곡에 든다. 천종원은 2013년 대학생이 되었지만 2월생이라 학교를 일찍 들어가 만으로 19세다. 나이를 따지지 않아도 고교생인지 대학생인지 가늠할 수 없는 앳된 얼굴이다.
갈림길에서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어느 쪽인지 묻는다. "작년에 한 번 와서 등반해 봤다"는 표시가 난다. 럭키는 얼마 안 가 나타났다. 등산로가 아닌 임도 옆에 있다. 임도 아래 너른 터로 내려서자 입구를 막고 있던 바위의 뒷모습이 드러난다. 동굴처럼 어두운 곳이 럭키의 스타트 지점이다. 4~5m 높이 바위 뒤편에 루프가 있다. 대충 봐도 최고수가 아니면 스타트가 되지 않는 어려운 루트다. 비스듬한 오버행 벽은 맨들맨들 하다. 크게 잡히는 홀드가 없다. 그나마 살짝 튀어나온 홀드도 1m 이상 떨어져 있어 시작부터 몸을 날려야 한다.
여기서 쉬워지는 것도 아니다. 두 번째 흐르는 홀드를 손가락으로 잡고 점프하느라 요동치는 몸을 정지시킨 다음, 몸 전체를 손가락으로 버텨야 한다. 손가락으로 버티며 밸런스를 잡아 몸 전체를 끌어올려, 홀드가 좋은 바깥 라인을 타고 바위 위로 올라서면 끝난다. 크럭스 다음에 크럭스, 시작과 동시에 원투펀치를 날리는데 이걸 정면 돌파하는 것이 관건이다. 국내 최고 난이도 볼더답다.
햇살의 힘이 센 정오, 아직 젖은 홀드가 있다. 칫솔을 꺼내 분주히 초크를 묻힌다. 연결 동작을 몇 번 연습하더니, 바로 도전한다. 바위의 기세에 전혀 밀리지 않는다. 표정과 말에 자신감이 배어 있다.


윗옷을 벗는다. 무브를 방해하는 요소를 최소화하기 위해 서다. 군살이라곤 1%도 없는 근육질 몸이 드러난다. 많은 전투를 치른 장수마냥 가슴부터 다리까지 온 몸이 상처투성이다. 벽에 몸을 부대껴야 하는 볼더링 특성상 잔잔한 상처를 달고 산다. 실내암장에서 주로 훈련을 해와서인지 피부는 도시 소년답게 하얗다. 눈망울은 순수하면서 동시에 포식자의 매서움이 담겨 있다.
하얀 소년이 동굴 속에 섰다. 홀드를 잡고 "하~압!"하고 기합을 불어넣는다. 변신의 주문마냥 여리게 보이던 소년이 절정의 기량을 갖춘 클라이머로 변신한다. 개구리처럼 벽에 거꾸로 매달린 후 팔을 뻗어 다음 홀드를 잡아챈다. 침착하게 발을 정리하고 나머지 손을 옮긴다. 턱걸이하듯 흐르는 홀드에 매달린 상태에서 팔을 옆으로 옮긴다. 몸을 이동시킨 후 다시 발을 벽 안으로 넣어 몸을 눕힌다. 딱히 발이 걸리는 데가 없는 것 같은데 기막히게 균형을 잡는다.
그러고선 팔로 당겨 몸을 끌어올리곤, 발을 올려 다음 홀드를 잡는다. 순식간에 일어난 연속 동작인데 하나하나가 일반인들은 잠깐 멈춰 있기도 어려운 무브다. 단 한 동작만 성공하는 것도 어려워 보이는데 연속 동작을 한 치의 실수 없이 딱 떨어지게 해낸다. 군더더기 없는 과감한 무브, 바위가 놀란다. 손상원 이후 5년 만에 이런 고수는 처음인 것이다.
상단의 턱을 잡아 오버행을 빠져나오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멀다. '멀다'는 생각이 지워지지도 않았을 무렵, 먹이를 잡아채는 표범처럼 몸을 던져 왼손으로 턱을 잡아낸다. 그리곤 올라선다. 단순히 바위 하나를 올라서는 것이 아니라 볼더링 최강자의 자리에 올라선다. 제일 높은 곳에 올라서서 뒤돌아선다. 어린아이처럼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양 손의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놀라운 등반이다. 첫 시도에서 아무렇지 않게, 쉽게 해내다니……. 구경꾼이 없어 박수와 탄성 소리가 없는 것이 어울리지 않게 느껴진다. 지켜보는 건 초록의 푸른 나무와 흐르는 계곡이다. 다만 완등 장면은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남겼다.
천종원은 늦게 등반을 시작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의 권유로 홀드를 잡았다. 공부에 취미가 없었기에 운동이라도 해보라고 한 것이다. 서울 성수동의 K2실내암장에서 이창현에게 지도받았으며, 수유동 노스페이스암장에서 김자인의 오빠 김자하에게도 지도받았다. 한양공고 산악부에 특례 입학한 그는 오로지 등반만 했다. 산악부 지도교사인 이형근 교사가 "제발 수업 좀 들어가라"고 잔소리를 할 정도로 그는 여차하면 수업을 빼먹고 수유동 노스페이스 실내암장을 찾아 등반했다.
고교 1학년 때 산악부에서 요세미티 등반을 갈 기회가 있었지만 훈련을 하다 "못 가겠다" 하여 빠진 적도 있다. 인수봉 등반 훈련을 했는데 인수봉까지 매번 걸어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힘을 쓰는 볼더링 등반은 자신 있지만 산을 오르는 지구력은 약하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로프를 묶고 긴 벽을 오르는 리드등반은 하지 않고, 오로지 짧은 벽을 오르는 볼더링만 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또 한 우물만 파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실력이 급상승한 건 고교 3학년 때와 작년이다. 남들이 학업에 몰두하는 고교 3학년 때 그는 등반에 올인했다. K2암장에서 손상원·김명수와 함께 훈련하면서 배운 것이다. 이때 1년 동안 "홀드 잡는 감각 훈련을 한 게 컸다"고 한다. 민현빈에게도 고마워했다. 그의 "너는 볼더링에 소질이 있으니 볼더링만 해봐라"는 권유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불암산의 고난도 볼더인 토탈리콜(V12)을 완등했다. 역시 손상원이 초등한 국내의 대표적인 고난도 볼더인데 이를 오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11월에 토탈리콜을 완등하면서 한 단계 더 성장했다.
첫 바위로 국내 최강 난이도를 만난 17세 소년
이승범이 바위 앞에 우물쭈물 서있다. 오늘이 그의 자연바위 첫 등반이다. 그는 도봉산 아래의 소방서에서 119산악구조대로 근무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등반을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지리산을 종주하고 설악산을 올랐다. 경기도 양주클라이밍센터에서 운동을 시작해 5~6학년 때는 초등부 경기에서 1등을 뺏긴 적이 없었다. 등반에 소질이 있었던 것이다.
중학교 때는 수유동 노스페이스 암장에서 김자하와 이재용 센터장에게 지도를 받으며 실력이 늘었다고 한다. 지금은 천종원의 암장에서 함께 훈련하고 있다. 자연바위를 처음 시작하며 상투를 틀고 있는 이승범은 가능성이 큰 클라이밍 유망주다. 183cm로 키가 큰 데다 팔이 길어 등반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 바위의 촉감이 생소한 이승범이기에 스타트가 되지 않는다. 크럭스를 생략하고 오버행 끝에 툭 튀어나온 라인을 따라 등반해 보라고 천종원이 권한다. 동작을 잇지 못하고 툭툭 떨어지나 싶더니 어느새 상단 홀드를 몸을 날려 휙 잡고 발을 써서 몸을 끌어 올린다. 크럭스를 생략했다지만 처음 바위를 만져보는 것치고는 상당한 잠재력이다.

염동우 사진기자가 촬영을 많이 못 했다며, 한 번 더 해볼 수 있냐고 묻자, 천종원은 "네"라고 짧게 답하곤 초크백을 든다. '럭키'는 고난이도 루트라 완등했다고 해도 바로 재등할 수 있다고 장담하긴 어렵다. 천종원이 아무렇지 않게 벽 앞에 선다. 처음과 같이 기합을 넣고 거짓말처럼 더 과감하고 부드러운 무브로 완등해 낸다. 몸이 홀드의 감각을 저장하고 있는 것마냥 난제를 풀어낸다. 간신히 V13 난이도를 해낸 것이 아니라 실력이 V13을 차고 넘친 것이다.
"기분 정말 좋아요. 지금 몸이 월드컵 컨디션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올라와 있어요. 홀드를 닦을 때부터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왔어요. 오늘 끝낼 것 같았어요. 럭키는 전체적으로 어려워요. 스타트부터 점프해서 손 거는 것도 그렇고, 두 손으로 흐르는 홀드 잡고 버티는 것도 어렵죠. 상단 칠 때도 그늘에 있다가 밖으로 나와서 눈부셔서 홀드가 잘 안 보여요. 다만 상단은 툭 튀어나온 홀드가 좋아서 대충 던져도 잡혀요. 재등할 때는 쉬웠어요."
그는 가장 좋았던 등반으로 지난 6월 월드컵에서 우승할 때와 럭키를 완등하고 바로 재등한 오늘을 꼽는다. 그러나 볼더링 리드등반에 비해 변수가 더 많아 1인자의 자리를 지키기가 쉽지 않다. 당일 컨디션과 문제 스타일이 크게 작용해 지난 대회 우승자가 다음 대회에서 예선 탈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정상급 실력의 비결을 묻자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이라 한다. 이틀 운동하고 하루 쉬는 방식이며, 식사는 저녁 한 끼만 먹는다. 그것도 반찬 없이 주먹밥만 먹고 간간이 수박을 먹는다. 175cm의 키인 그는 체중 53.4~53.6kg이 나와야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한참 많이 먹을 나이지만 "절제의 고통보다 월드컵에서 우승해서 느끼는 희열이 더 크다"고 얘기한다. 등반하다 생긴 많은 흉터에 대해서도 "이제 웬만한 상처는 신경도 안 쓴다"며 실력자다운 얘기를 한다.

스포츠클라이밍 특기자로 단국대 천안캠퍼스 국제스포츠학과에 입학한 그는 올해 아디다스와 좋은 조건으로 계약해 안정적인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모든 것이 뜻대로 잘 풀리고 있는 셈이다. 올해 남은 볼더링 대회를 치른 후에는 겨울에 미국 비숍으로 볼더링 여행을 가서 V14 난이도에 도전할 계획이다.
그는 등반도 훈련도 모두 즐긴다. 힘든 훈련 과정도 "내가 점점 강해진다는 느낌에 취해 즐겁게 하게 된다"고 한다. 대회에서도 "자신감이 생겨서 긴장이 안 된다"며 "'무조건 잘하자, 무조건 완등한다'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한다"고 말한다. 또래 친구들처럼 연애도 즐겨 노스페이스 클라이밍팀의 사솔과 3년째 사귀고 있다. 같은 클라이밍 선수이기에 "서로 운동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한다.
5년 전 한양공고 산악부실에서 반짝이는 눈망울의 소년을 만났었다. 소년은 "월드컵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싶다"고 꿈을 얘기했었다. 꿈을 이룬 소년은 이제 다음 꿈을 좇는다. 월드컵 최다 우승자가 되는 것이다. 그때 그 소년 천종원은 볼더링 샛별에서 월드 챔피언이 되었다. 허나 "아직 전성기는 오지 않았다"고 말한다. 스스로 더 강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두 소년이 북한산을 내려간다. 장난치고 웃는 모습이 또래와 다를 바 없지만 등반에 대한 꿈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따라 북한산성계곡이 유난히 맑고 시원하게 흘러간다. 북한산이 흐뭇하게 두 소년을 바라보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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