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나의 권위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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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강 덕분에 요즈음 자주 접했던 기사다.
개인이나 조직(제도), 관념 등이 그 구성원에게 자연스러운 영향력을 미칠 때 그것을 '권위'라 한다.
권위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해 따르게 하는 신망(信望)이며, 실력과 책임감, 방향의 적합성 등이 구성원의 자발적 동화(同化)를 이끄는, 한마디로 '자연스러운 영향력'이다.
수긍할 수 있는 역량(力量)을 발휘할 때 권위가 생겨나고, 신뢰 또는 감동을 주지 못하면 권위는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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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노벨상은 그 권위만큼이나…’
작가 한강 덕분에 요즈음 자주 접했던 기사다. 반면 ‘땅에 떨어진 권위’도 자주 등장한다. 국가기관, 종교, 의학, 아버지, 교사의 권위 등은 무엇하나 땅에 떨어지지 않은 게 없는 것 같다,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틈나면 책을 읽었는데, 너희들은 왜 스마트폰에 빠지는지 모르겠다.” 퉁명스러운 대꾸가 돌아온다. “할아버지 때는 스마트폰이 없었잖아요!”
주워들은 우스갯소리지만 ‘버릇’에 굳어 있는 기성세대의 시각으로 보면 ‘버르장머리’ 버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과연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는 것일까? 땅에 떨어진 권위는 주워 담을 수 있을까?
개인이나 조직(제도), 관념 등이 그 구성원에게 자연스러운 영향력을 미칠 때 그것을 ‘권위’라 한다. 권위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해 따르게 하는 신망(信望)이며, 실력과 책임감, 방향의 적합성 등이 구성원의 자발적 동화(同化)를 이끄는, 한마디로 ‘자연스러운 영향력’이다. 수긍할 수 있는 역량(力量)을 발휘할 때 권위가 생겨나고, 신뢰 또는 감동을 주지 못하면 권위는 떨어진다.
필자의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농사에 관한 모든 걸 가르치셨다. 이른 봄 못자리 만드는 것에서부터 겨울철 보리 고랑 북돋우기까지.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 밥이 하늘이었던 시절, 가부장(家父長)으로서 할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이때의 권위는 전통적인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위계와 농사 전문가로서의 실력에서 나오는 것으로, 가족들의 자연스러운 수긍(首肯)에 할아버지의 말씀은 우리 집의 법이었고 정답이었다.
탈권위 시대에 무슨 권위 타령이냐고? 하지만 수많은 사회문제, 특히 청소년 문제의 배경에는 권위의 부재가 자리잡고 있다. 그것은 사회와 가정에 실천적 모범과 감동이라는 영향력이 없기 때문이다. 감동은 상대방의 자발적 인정(認定)과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행위에서 나온다. 인품도 감동을 주지 못하고 정보도 부족한 기성세대의 ‘권위적’인 말과 글이 신세대에게 먹혀들 리 없다. 우리는 권위가 없는 사람이 권위가 있는 것처럼 보이려 할 때 ‘권위적’이라 한다. 연장자 혹은 윗사람이 ‘버르장머리’ 운운하는 것은 자신의 권위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자기 증언일 수도 있다. 기성세대의 이전투구(泥田鬪狗)에서 권위라는 단어는 사치일 뿐이고!
이제는 창의천하지대본(創意天下之大本), 재미가 하늘이다. 재미라는 감정은 평등한 관계에서 나타난다. 인간 관계가 수직에서 수평으로 바뀌었다는 말이다. 이때 우리는 인지적 유연성이 필요하다. 나의 전략을 바꾸어야 한다. 내가 가진 게 망치밖에 없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 그래서 망치로 문제를 다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면 내 도구를 바꾸어야 한다. 기성세대의 관점에서 세상을 버르장머리로만 재단할 수 없다. 기원전 1700년 쯤 수메르에서 나온 점토판에 ‘요즘 애들은 버르장 머리가 없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지 않던가. 버르장머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할 수밖에 없는 세대간 문화차이에서 오는 갈등구조이다. 기성세대의 반성과 권위 회복이 우선이다.
전통적 권위가 힘을 잃은 이 시대의 권위는 인품은 물론 ‘능력 또는 실력’과 함께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할아버지보다 스마트폰과 아이돌에 더 밝은 손주에게 권위를 갖기란 쉽지 않다. 인위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지구 전체 넓이의 10분의 7은 바다이고, 바다의 7분의 4는 남반구에 있다. 북반구의 육지 넓이는 지구 전체 넓이의 몇 분의 몇인가?’
지난 추석에 초등학교 4학년 손녀가 내민 문제다. 선행학습지에 들어있는 5학년 과정의 문제라고 했다. 무려 14분이나 걸려 풀었다. 10여 분이 지나자 손녀가 힌트를 주겠다고 했다. 거절했다. 할아버지로서의 권위가 흔들릴 것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앞으로 손녀에 대한 권위 유지를 위해 ‘수학의 정석’을 다시 공부해야 될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의 권위는 무엇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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