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법조와 정치, 법조인과 정치인

송진영 기자 2024. 11. 6.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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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취재기자들에게는 담당하는 기관, 출입처가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기피하고 싶은 곳은 ‘법조’다. 법원(판사) 검찰(검사) 변호사단체(변호사) 등 한자어로 ‘법의 무리’인 법조는 난공불락의 취재 현장이다. 검찰은 피의사실 공표죄를 내세워 언론과의 접촉을 사실상 차단한다. 지방검찰청과 산하 지청에 부장검사급 이상의 인권보호관을 임명해 공보 업무도 병행하도록 했지만 수사 과정을 알 수 없는 인권보호관은 “수사 중인 사안”이라는 답변 외 특기할 만한 발언을 하지 않는다. 인권보호관이 없으면 차장검사와 대화라도 할 수 있으니 그게 더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전경. 국제신문 DB


법원도 매한가지다. 기획법관(공보판사) 외 재판부를 상대로 한 취재는 ‘봉쇄’된 지 오래다. 법원장과 검사장의 직접 취재는 언감생심이다. 여기에 법이라는 딱딱하고 어려운 소재를 다루는 곳인 데다가 공부만 가장 잘했던 집단이 내뿜는 엘리트 의식, 조직의 폐쇄성까지 더해진 법조는 그야말로 취재 영역에서는 사막이나 다름 없다. 이런 곳을 3년이나 출입했으니 나름 할 이야기가 많다.

의뢰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변호사를 제외하고 판사와 검사는 기본적으로 사안의 시비나 다툼을 중재 내지는 판단하는 주체다. 사적 제재를 금하는 근대 형사법 체제에서, 사적 분쟁이 한층 강화된 민사 분야에서 법조인은 국가공동체 유지를 위한 필수불가결의 존재로 존중 받고 권위를 가져야만 한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법조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이들은 법과 원칙에 따른 결정(처분 또는 판결)으로 평가받는다. 게다가 오직 지나간 사건을 놓고 승패와 시비를 가리는 일을 한다.옳고 그름을 따져 명확한 해답을 찾는 데 주력하기에 보수적 속성을 지니면서 철저히 과거 지향적이다. 사후적 판단으로 선과 악, 유죄와 무죄, 승소와 패소 등 이분법적 결론만 내릴 뿐 총체적 해결책을 내놓을 필요가 없는 직업군이다. 우리법연구회장을 지낸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부산지법 부장판사 시절 “판사는 사실 법률 결론이라는 프로세스를 따를 뿐, 기본적으로 우파지 좌파가 될 수 없다”고 했다.

조희대 대법원장이 대법원 대법정에서 ‘장애인 접근권 국가배상소송’ 전원합의체 공개변론을 진행하는 모습. 국제신문 DB


대다수의 법조인들은 학창시절 공부를 잘해 명문대를 나와 국가 자격고시 중 가장 권위 있는 사법시험을 통과했다는 엘리트 의식으로 중무장했다. 판사와 검사는 법정과 조사실에서 피고인과 피의자로 마주한 시민을 심판하는 주체다. 이 장면에서 ‘잘난 우리’가 ‘못난 너희’를 처벌한다는 인식에 사로잡힐 가능성이 크다. 상대적 우월감까지 더해질 수 있는 장면이다. 게다가 지기 싫어하는 호전성도 있으니 잘못이 있더라도 인정하고 사과하는 판사와 검사는 매우 진귀한 존재다. 국민이 법원을 믿고 맡긴 공탁금을 한 두 푼도 아니고 48억 원이나 법원 직원이 빼돌린 초유의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법원장이 사건이 알려진 지 10개월이 지나서야, 그것도 국정감사에서 질책을 받고서야 공식 사과하는 일이 있었다. 만일 법원이 아닌 행정기관이나 사기업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그 조직은 어떻게 됐을까. 해체 와해 형해화 그 어떤 표현을 동원해도 모자랄 만큼 혹독한 대가를 치렀을 테다.

법조의 생리와 법조인의 습성을 길게 언급한 이유는 법조 출신들이 국정을 맡은 작금의 현실을 반추해 보기 위함이다. 우리 국민은 유독 법조인의 정치 참여를 선호한다. 사농공상의 유교문화와 학벌주의라는 망국적 사고에, 판사와 검사는 ‘정의의 사도’일 것만 같은 환상이 더해진 결과일 터. 대통령은 물론 원내 제1·2 정당의 대표, 지난 4월 총선으로 구성된 22대 국회의원(300명)의 20.3%(61명)가 법조인이다. 이는 역대 최대 수준이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국정을 맡기고 입법권을 부여한 결과는 어떤가. 대화와 타협, 설득과 협상을 토대로 미래를 설계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전매특허인 법과 원칙에 의한 법치가 확립되고 공정과 정의의 정신이 자리 잡았는가. 아니면 법조와 정치를 분간하지 못한 채 국민을 ‘못난 너희’로만 여기고 ‘잘난 우리’ 행세만 하는 이들만 남았나. 국민의 대답이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송진영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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