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시선] K컬처, 축적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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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정부에서 경제과학특보를 지낸 서울대 산업공학과 이정동 교수는 '축적의 전도사'다.
대한민국이 중진국의 함정(더 정확하게는 '중간소득의 함정')을 돌파하고 선진국 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도, 1단 로켓을 쏘아 올린 후 2단 점화가 지연되면서 성장엔진이 점차 식어가고 있는 이유도, 모두 축적의 유무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이 교수는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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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정부에서 경제과학특보를 지낸 서울대 산업공학과 이정동 교수는 '축적의 전도사'다. 대한민국이 중진국의 함정(더 정확하게는 '중간소득의 함정')을 돌파하고 선진국 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것도, 1단 로켓을 쏘아 올린 후 2단 점화가 지연되면서 성장엔진이 점차 식어가고 있는 이유도, 모두 축적의 유무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이 교수는 주장한다. 대한민국호가 뛰어난 '실행력'을 바탕으로 놀랄 만한 성과를 이뤄냈지만, 백지 위에 밑그림을 그리는 '개념설계'의 부재로 기술선진국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실행력의 축적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는 또 다른 단계의 축적을 통해 새로운 길을 열어가야 한다는 주문이다.
나는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을 지켜보며 뜬금없이 이 교수의 '축적의 길'(지식노마드 펴냄)을 떠올렸다.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오랜 세월 한국이 쌓아올리고 누적해온 문화적 축적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에서다. 강둑은 그냥 툭 터지는 게 아니다. 한 사회가 이룩한 성과는 오랜된 것들의 축적, 혹은 그것들의 누적의 결과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투자의 대가' 워런 버핏은 자신이 이룬 부의 상당 부분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가 벌어준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세상은 한 사람의 고수나 천재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뚝딱 만들어지지 않는다. 한 작가도 이번에 수상 소식을 접하며 비슷한 말을 했다. "선배 작가들의 모든 노력과 힘이 제게 문학적 영감을 줬다"는 그의 말은 단순한 겸양이 아니다.
한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과 이른바 K컬처의 놀라운 성과를 단순하게 연결짓는 건 분명 단견이다. 하지만 '한강(漢江)의 기적'이 기적이 아니었듯이, '한강(韓江)의 기적' 역시 단순한 기적이 아니다. 한 작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았다. 한 작가의 소설과 시는 지난 백년간의 한국문학 전통 위에 놓여있고, 무엇보다 이 땅에서 억압받고 고통받은 사람들의 아픔과 눈물이 자양분이 되어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전 세계를 강타한 K컬처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들은 스웨덴 한림원이 한 작가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한 직후 이 소식을 긴급 타전하면서 "점점 커지고 있는 한국문화의 세계적 영향력을 반영한 결과"라고 썼다. '1인치의 장벽'을 넘어선 '기생충'의 봉준호와 아름다운 한국어로 노랫말을 쓴 방탄소년단(BTS)이 '묵은 별빛'이 되어준 셈이다.
한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더 높은 곳을 바라보게 만든다. K컬처와 K문학이 이룬 성과에 버금가는 결과물이 과학기술 분야에서 터져나오지 말란 법이 없어서다. 이 교수는 이를 '베이스캠프 효과'라는 말로 설명한다. 에베레스트처럼 높은 산에 올라갈 땐 베이스캠프에서부터 시작해서 한 단계씩 올라가게 마련이다. 한 작가가 만들어 놓은 마음속 베이스캠프는 더 높은 목표를 설정하게 하고, 높아진 베이스캠프는 젊은 세대의 패기와 도전 정신을 자극해 정상에 오르는 그날을 확 앞당길 수 있다는 얘기다. 이때 우리 사회와 기성세대가 그리고 국가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도전과 실패가 헛되이 사라지지 않고 '축적'될 수 있도록 길을 활짝 열어주는 것이다.
jsm64@fnnews.com 정순민 문화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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