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아의 도시스카프] 명동스퀘어와 아이언맨 수트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디지털 세상에서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하다. 21세기 디지털 세상은 도깨비방망이처럼 원하는 것을 순식간에 이루어준다. 명령어 하나로 가상의 캐릭터를 자동차 위로 '붕' 날게도 하고, 차가운 빌딩 벽면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흥미로운 경험도 제공한다. 한국판 뉴욕스퀘어를 꿈꾸는 명동스퀘어의 모습이다.
아나모픽 기법이라는 착시 기법으로 만들어내는 실감형 콘텐츠는 분명 외국인 관광객 3000만명이라는 목표 달성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할 것이다. 수많은 기업과 브랜드도 이곳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 원할 것이다. 공간이 입는 디지털 옷처럼!
상상 속 디지털 혁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만약, 영화 속 스파이더맨이나 아이언맨 수트가 현실이 되면 어떨까? 팔을 쓱 만지면 쫄쫄이 수트가 입혀진다. 버튼만 누르면 원하는 디자인의 옷을 순식간에 입을 수 있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출장이나 여행길에 이보다 편리한 게 있을까. 디지털 기기 한 두 개만 있으면 전 세계 어디나 갈 수 있다.
그때가 된다면 서랍장의 옷들은 어떻게 될까? 디지털 기술로 만들어낼 수 없는 독특한 디자인과 섬유는 아마 소더비 경매에 나올법한 진귀한 예술품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 자판기 커피보다 직접 원두를 볶고, 드립하는 애호가들처럼 말이다.
디지털 세계는 무한히 다양하지만, 실체가 없는 신기루와도 같다. 전원이 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과정 없이 결과만 존재한다. 디지털 세상 속 도시도 그렇다. '뚝 딱!'하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도시의 역사를 몇 분 만에 볼 수는 있지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도시는 '세월'이라는 이끼가 하나 하나 쌓여야만이 비로소 형성되기 때문이다.
익선동 골목길이나 북촌 한옥마을을 걷다 보면 간혹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민 감나무들을 만날 수 있다. 추위가 찾아올 때 대롱대롱 달린 붉은 감들은 꽃처럼 보이기도 하고, 풍성한 먹거리도 된다.
그 길을 늘 지나는 사람들은 잎이 피고, 꽃이 피며 열매가 맺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몇 잎 붙었던 가을 감들은 날이 더 매서워지면 잎을 모두 떨구고, 가지에 매달려 붉은빛을 예쁘게도 비추인다. 운 좋게 눈이 내릴 때까지 가지에 붙어 있던 열매들은 기꺼이 까치밥이 되어준다.
하얀 눈 사이로 새빨간 열매가 드러나고, 얼어있는 감을 까치가 쪼아먹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은 어떤 디지털 기법도 줄 수 없는 생생한 경험이다. 수억짜리 스피커를 써도 디지털 음원이 LP의 해상도를 따라잡을 수 없는 것과 같다.
디지털 음원은 클릭 한 번이면 되지만, LP는 판을 골라 플레이어에 걸고 바늘을 올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지지직"하는 소리조차도 간직하고 싶은 소리다. 수고가 따르지만, 그조차도 LP 애호가들에게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 된다.
학교에서 디지털 교과서로 학습을 해 온 MZ세대가 오래된 책의 냄새와 책장을 넘기는 감성을 모른다고들 하지만, 세대 간의 경계는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편리성 때문에 전자도서를 선호하는 것 같아도 소장하고 싶은 책은 실물로 사서 줄을 치고 메모도 남긴다. 그들은 책을 필사하고, 각종 인증사진과 디지털 피로감으로 빠른 속도로 인스타그램을 떠나고 있다. 각자의 생각을 적고 나누는 스레드로 몰리고 있다. 모바일로 뉴스를 빠르게 볼 수 있어도 종이신문을 아직도 고수하는 사람들도 있듯이 말이다.
물론 오프 그리드(off-grid) 생활방식을 택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인 듯싶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때 굴렁쇠 하나를 굴리는 소년이 나오는 장면은 세계적으로 큰 인상을 남겼다. 특별한 기술이나 장식적 요소를 배제하고 순전히 '굴렁쇠와 소년' 만으로 한국의 정서와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던 그 장면. 과도한 장식이나 화려한 포스트모더니즘 연출과는 대조적으로 절제된 미학이 주는 강력한 사례였다.
아이러니하지만 디지털 세계가 커질수록 아날로그에 대한 매력도는 더 높아진다. 도시가 삭막해서 교외로 나가고, 지자체는 그런 시민을 위해 공원을 만들고 축제를 만든다. 그래도 갈증을 느끼는 시민들은 광장에 모여드는 사람 냄새와 그들의 문화가 그리워 휴가만 생기면 해외로 떠난다.
사람은 사람 냄새를 맡고 사람의 온기를 느끼며 살아야 하는 존재다.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올까? "명동 000백화점 앞에서 봐" 대신 "광화문 광장 앞 감나무 아래서 봐"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날 말이다.
적어도 현실 속 세계에는 시작과 과정이 있다. 급속한 성장과 변화 속에서 도시의 정서적 연결을 회복해야 할 시점이다. 가까운 부산을 포함해 바르셀로나와 파리는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기도 했다. 오죽하면 관광객 반대 시위를 하며 '도시를 시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운동을 했을까. 결국 과도한 관광 상업화로 사라진 동네가 살고, 광장은 다시 주민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파리는 15분 거리에 시민의 일상에 필요한 것을 배치했다.
관광객을 위한 화려한 쇼핑센터 대신, 시민의 삶이 우선이었다. 굴렁쇠 소년이 보여준 것처럼, 답은 늘 가까이에 있다. 가장 소박한 곳에 진정한 '우리의 도시'를 만드는 시작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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