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美 뉴요커들의 투표소에 가봤습니다
올해 대선은 전례 없이 ‘극과 극’으로 다른 두 후보(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 겸 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 겸 전 대통령)가 유례없는 초박빙의 승부(오차범위 내 1% 접전)를 펼치고 있기 때문에 세계 각국의 관심이 매우 큽니다.
단, 여기서의 접전이란 사전 여론조사 기준입니다. 미국의 대선 여론조사는 “2016년엔 틀렸고, 2020년에는 더 틀렸다(뉴욕타임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오명을 갖고 있어서 완전히 믿을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미국 대통령이 누가 되느냐에 따라 한국도 외교, 안보, 산업 등 많은 정책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중요한 선거입니다.
선거 당일인 오늘, 미국 유권자들은 어떻게 투표를 했을까요. 이 또한 주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릅니다만 전 오늘 뉴욕 맨하튼 투표소를 기준으로 그 풍경을 전해드리려 합니다. 원래 투표소에는 투표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고, 사진이나 비디오 촬영은 더더욱 안됩니다. 하지만 미 국무부 산하 뉴욕외신기자센터의 허가를 받아 오늘 오전 맨하튼 투표소의 모습을 담아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가 찾아간 투표소는 맨하튼 한복판의 ‘아트 앤 디자인 고등학교’에 마련된 투표소였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학교 근처 길에 접어드니 바닥의 화살표가 친절하게 투표소로 가는 길을 안내해 줍니다.
투표소에 들어가기 전 미리 알고 가야 할 한국과 다른 미국의 선거방식을 몇 가지 핀포인트 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나라의 경우 18세 이상 국민이 되면 누구나 투표권을 갖게 됩니다. 따로 신청을 하지 않아도 집으로 선거 우편물이 알아서 착착 날아오고, 선거 날 신분증만 가지고 투표소에 가도 모든 게 물 흐르듯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미국은 좀 다릅니다. 아무리 시민권을 가진 18세 이상 국민이어도, 유권자가 되겠다고 스스로 등록하지 않으면 투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투표를 하기 전에 ‘유권자 등록’이라는 하나의 절차가 더 있는 것입니다.
지지난주에 경합주 중의 경합주로 꼽히는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로 출장을 갔을 때(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41028/130304727/2) 마침 유권자 등록 마지막 날이었어서 사전투표소 줄이 굉장히 길었습니다.
인터넷으로도 등록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사전투표소까지 와서 등록을 하냐고 물었더니 몇몇 분이 “내 투표권이 제대로 등록됐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어떤 흑인 중년 여성분은 “인터넷으로 등록했는데 잘 된 건지 불안해서 확인하러 왔다”고 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투표에 대한 적극성과 열의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미국 선거가 한국과 다른 점은(사실 이 부분은 한국이랑만 다른 게 아니라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상당히 독특한 미국만의 방식인데) 국민으로부터 가장 많은 표를 받는 후보가 반드시 대통령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이 100명이라고 할 때 51명의 국민이 김 씨라는 후보를 찍고 49명이 이 씨라는 후보를 찍었다면 김 씨의 승리입니다(초등학교 회장선거만 봐도 대부분의 선거방식이 그렇죠).
그런데 미국은 국민의 투표 수를 기준으로 하는 게 아니라 ‘선거인단’이란 개념을 가지고 대선 승패를 가릅니다. 선거인단은 주의 인구수에 비례해 배분되고 ‘승자독식제’입니다(네브라스카주와 메인주 제외).
예를 들어 뉴욕주 주민들이 민주당을 51% 뽑고 공화당을 49% 뽑았다면 과반을 넘긴 민주당이 뉴욕주의 전체 선거인단 28명을 모두 가져갑니다. 공화당을 뽑은 49%의 의견은 사표(死票·죽은 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여러 주에서 반복되면 어떻게 될까요? 일부 주에서 큰 격차로 이겨 국민의 총 투표수로는 승리를 했더라도, 간발의 차로 선거인단에서 밀리는 주가 생기면 최종적으로 질 수도 있는 상황이 생깁니다. (실제 2016년 대선에서 이런 일이 벌어져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더 많은 국민 표를 얻고도 트럼프 공화당 후보에게 패했습니다.)
하나 더. 한국에도 어느 정도 ‘지역 정치색’이라는 게 있듯이 미국도 그렇습니다. 뉴욕은 진보, 와이오밍은 보수,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주는 주별 정치색을 안정적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거 때마다 자꾸 결과가 왔다 갔다해서 안정적으로 예측이 안되는 7개 주가 있는데, 그게 항상 기사마다 등장하는 ‘경합주’입니다.
대선 주자들은 총 538명의 선거인단 중에 과반인 270명 이상을 확보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경합주에 있는 선거인단을 반드시 자기 쪽으로 끌어와야만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현실적으로 후보자들은 오직 경합주만 관심을 보이고 안정적으로 결과가 예상되는, 이른바 ‘이미 잡은 물고기’ 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곳에서는 시간을 쏟아봤자 결과가 뒤바뀌지 않을테니까요. 결국 대선 기간 내내 후보들은 집중적으로 경합주 7곳을 돌며 표심 따기에 전념하는데, 뉴요커인 미국인 친구는 (7개 주 국민에게만 신경 쓰는 이런 선거방식이) “정말 짜증난다”고 울분을 토하더군요.
복잡한 선거방식을 설명하다 보니 어느새 투표소 건물 1층에 도착했습니다. 주민들은 표지판에 적힌 자기 선거구 표식을 찾아 보고 5층 강당에 마련된 투표소로 올라가게 됩니다.
5층 강당에 올라가니 각 선거구별 선거관리위원들이 책상에서 유권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서 신분증 등을 보여주면 신원을 확인한 뒤 투표용지를 나눠줍니다.
맨하튼 카운티 투표 용지에는 영어, 스페인어, 중국어 세 가지 언어가 병기돼 있습니다. ‘1965년 투표권법’에 따라 특정 소수언어를 사용하는 유권자가 지역 인구의 5% 이상이거나 1만 명 이상이면 투표용지에 그 언어를 병기해 줍니다. 두 언어는 통역관도 배치돼 있었습니다.
그나저나 대통령 선거라고 하기에는 투표용지가 꽤나 복잡해 보입니다. 미국 대선에서는 우리나라로 치면 총선과 지방선거 등이 함께 치러져서 그렇습니다. 오늘 뉴욕 맨하튼 유권자들은 대통령 뿐만 아니라 연방 상·하원의원, 주 법원 판사 등도 같이 뽑았습니다.
받은 용지를 칸막이 책상으로 가져가서 신중히 마킹합니다. 투표용지 글씨가 워낙 작다보니 책상마다 노약자를 위한 책받침 만한 커다란 돋보기가 배치돼 있었습니다.
아이와 함께 온 사람, 반려견과 함께 온 사람, 아기를 안고 온 사람, 보행기에 의지한 사람 등 다양한 뉴욕 유권자들의 모습입니다.
마킹을 마치면 전자 투표함에 종이를 삽입합니다. 투표용지는 잠금장치가 채워진 인식기 안으로 들어가 개표까지 안전히 보관됩니다.
뉴요커들은 투표용지를 받을 때 함께 준 ‘투표인증 스티커’를 가슴에 붙이고 자랑스럽게 투표소를 떠났습니다. 왼쪽은 지지난주 취재한 필라델피아 사전투표소에서 배부했던 스티커고, 오른쪽은 오늘 뉴욕 투표소에서 나눠준 스티커입니다. 지역마다 디자인이 다른 걸 알 수 있습니다.
투표소 취재를 마치고 나오며 한 중년 여성 유권자에게 어느 후보를 선택했냐 물으니 ‘해리스’라고 답했습니다. ‘뉴욕은 어차피 해리스가 이기는 (진보)지역이라 걱정 없겠다’고 했더니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해리스가 이길 곳이어도 투표는 해야지요. 권리 위에 잠자면 안돼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공짜로 얻어지는 건 없으니까요.”
권리 위에 잠자지 않은 미국인들의 선택을 받은 후보는 과연 누구일까요. 결과를 기다려보겠습니다.
뉴욕=임우선 특파원 ims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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