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 마스킹테이프 아티스트 ‘롤드페인트’ 채민지 “누구나 풍부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공간”

정세영 기자 2024. 11. 6.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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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영의 공간 도슨트]

하찮고 귀엽게만 여겨지는 마스킹테이프에 몇 번의 손길을 더하면 훌륭한 아트워크로 재탄생한다. 롤드페인트를 운영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마스킹테이프 아티스트 채민지 씨는 마스킹테이프를 물감처럼, 연필처럼 사용해 유연하고 다채로운 그림을 그린다.

생활의 미감을 끌어올리는 공간을 찾아갑니다. 트렌드는 물론 고유성과 정체성을 갖춘 디자인부터 음식, 공간 속 숨은 이야기까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보고, 듣고, 먹는 특별함을 선사합니다.

중학생 때부터 20세까지 비걸(B-girl)로 춤을 추며 살아온 채민지(38) 씨는 아토피라는 병 앞에서 삶이 무너진 것 같은 경험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세가 악화해 외출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가 되자 그는 자신을 집 안에 가두며 몸을 긁지 않는 대신, 손을 집중시킬 만한 다른 무언가를 찾았다.

시작은 캘리그라피였다. 손으로 붓을 잡고 무언가에 집중할 수 있었지만 좋았던 시간이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아름다운 글귀를 써 내려가는 게 모순처럼 느껴졌기 때문. 그렇게 무기력한 시간을 보내다 마주한 것이 마스킹테이프였다. 주위에서 캘리그라피를 쓴 종이나 엽서를 벽에 붙일 때 사용하라며 선물해준 마스킹테이프가 어느 날 그의 눈에 들어왔다. 채 씨는 잠이 오지 않는 고요한 밤을 보내기 위해 테이프를 손으로 찢어 종이에 붙이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겹겹이 쌓여 블록처럼 단단해진 마스킹테이프를 보며 비로소 무언가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채민지 씨는 마스킹테이프를 찢고 오리고 붙이며 자신만의 그림을 그렸다. 진정한 몰입의 시작이었다.

그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마스킹테이프 아티스트들을 찾아가 다양한 도구와 작업 방식을 익혔다. 수많은 아티스트 작품을 관찰하며 여러 가지 새로운 방식으로 작업을 해봤는데, 역시나 손으로 찢어 붙이는 행위가 가장 재미있었다. 마스킹테이프 작업을 하며 느낄 수 있는 몰입감과 즐거움에 흠뻑 매료된 것. 결국 그는 창의적이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내며 국내 최초 마스킹테이프 아티스트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채민지 씨는 작품 활동에만 그치지 않고 마스킹테이프를 직접 만드는 것으로 작업의 영역을 확장했다. 그 출발은 돌돌 말려 있는 물감을 뜻하는 '롤드페인트’다. 5년 전 대구에서 처음 문을 연 뒤 지난해 5월 서울 마포구 서교동으로 거점을 옮겼다. 롤드페인트는 마스킹테이프 전문점으로 제품 구입은 물론, 채민지 씨의 다양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마스킹테이프를 만들고 소개하는 것도 직업의 일환"이라고 말하는 그는 롤드페인트를 "새롭게 마주한 캔버스 같은 곳"이라고 정의한다.

롤드페인트에 들어서면 아무리 결단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선택이 쉽지 않다. 기본 컬러는 물론이고 낮잠 자는 고양이, 꽃잎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형태, 사랑스러운 연인의 모습까지 없는 패턴을 찾기 힘들 정도다. 마음에 드는 제품은 직접 찢어 테스트 종이에 붙이고, 매장 가운데에 자리한 선반 위에서는 작품을 만들어볼 수도 있다.

채민지 씨는 롤드페인트가 마스킹테이프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마스킹테이프를 붙였다 뗐다 하는 행위를 통해 몰입의 가치를 느꼈으면 좋겠다"며 "마스킹테이프가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생소하게 여겨지는 마스킹테이프 전문점 오픈을 마음먹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제가 필요했거든요. 작업할 때는 주로 단색 마스킹테이프를 사용했는데 대부분 수입 제품이었어요. 국내에서 판매하는 매장도 거의 없고 온라인 구매도 쉽지 않았죠. 마스킹테이프를 다 써갈 때마다 구매처를 찾아보는 것도 번거롭고요. 그러다 mt(일본 유명 마스킹테이프 회사)에서 개최한 'mt Art Contest’에 참가하게 됐어요. 운이 좋게 우승자로 선정돼 일본에서 진행한 시상식에 참석했죠. 소감을 전하는 자리에서 "단색 마스킹테이프의 국내 공급이 원활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더니, 관계자분이 단번에 "알겠다!"며 "mt 제품을 직접 취급해 판매해도 좋다"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속 시원한 답변에 너무 기뻤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됐어요. mt 제품을 직접 사들여 공급하려면 절대적인 공간이 필요했거든요. 집에 수많은 마스킹테이프를 진열해놓을 곳도 없었고, 어딘가에 맡겨두기에는 조금 불안했죠. 오랜 고민 끝에 '마스킹테이프를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고 차근차근 준비해 롤드페인트를 열게 됐습니다. 마스킹테이프 판매보다는 저만의 개인 작업 공간이 생긴다는 것에 더 의미를 뒀던 것 같아요.

롤드페인트의 원래 용도는 개인 작업실이었네요.
맞아요. 하지만 생각처럼 되진 않더라고요. 사실 공간 오픈 후 몇 달은 혼돈에 휩싸였어요. 롤드페인트가 완성되면 개인 작업에 탄력이 생길 줄 알았는데, 언제부턴가 작업은 뒤로한 채 마스킹테이프만 팔고 있더라고요. 회의감이 들었죠. 혼란스러운 시간이 계속되며 롤드페인트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던 중 한 손님을 만나게 됐어요. "마스킹테이프 구매는 처음"이라며 설렘 가득한 눈빛으로 마스킹테이프를 쳐다보는데 마음이 울컥하더라고요. 제가 처음 마스킹테이프를 접했던 모습이 오버랩됐거든요. 그 손님과 자연스럽게 마스킹테이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롤드페인트라는 공간에서의 제 역할을 찾게 됐어요. 매장을 방문하는 수많은 사람에게 마스킹테이프의 가치와 희소성 등에 대해 안내하며, 마스킹테이프를 좀 더 대중화하는 길잡이 같은 역할을 하는 거죠. 개인 작업과 롤드페인트 운영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꽤 오랜 시간 부딪히며 지내왔던 것 같아요.
롤드페인트에 전시된 멋진 그림 대부분이 대표님 작품이죠.
모두 제가 마스킹테이프를 활용해 완성한 그림이에요. 저는 주로 일상적이고 자연적인 것들을 소재로 작품을 기획해요. 스케치 전에 작품에 사용할 컬러부터 구상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로 주변 사물이나 바깥 풍경을 보며 컬러 조합에 대한 힌트를 얻습니다. 색상을 결정한 뒤 그와 어울리는 주제를 잡아 작업을 시작해요. 또 작품뿐만 아니라 직접 마스킹테이프도 제작하고 있어요. 목적이 분명하고 손이 자주 갈 만한 디자인 위주로 제품을 만들죠. 사실 마스킹테이프 제작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롤드페인트를 운영하며 그 갈망이 커졌어요. 제가 직접 사용하고 싶은 마스킹테이프를 찾기 어려웠거든요. 색감이 은은하게 퍼지는 텍스처 디자인을 원했는데 아무리 서치해도 나타나지 않더라고요. '그럴 바엔 직접 만드는 게 좋겠다’ 싶어 원하는 디자인을 마스킹테이프 위에 직접 구현해냈죠. 디자인은 늘 저의 필요와 결핍으로 시작되는 것 같아요. 거의 매 시즌 제 감성을 담은 새로운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고요.

주기적으로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하긴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부담감도 있을 텐데요.
물론 쉽지 않지만 마스킹테이프를 통해 롤드페인트의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성취감과 기쁨이 큰 것 같아요. 사실 저희는 시즌에 맞춰 제품 준비를 하지 않아요. 그간 해왔던 패턴에 맞춰 차분히 진행합니다. 조금 느리더라도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는 디자인을 중심으로, 스스로 진정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질문들을 수차례 던진 뒤 확신이 생기면 공개하고 있어요.

작품 구현을 위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마스킹테이프가 있다면요.
롤드페인트의 첫 번째 마스킹테이프 시리즈로 제작한 수채물감이요. 자연을 담은 디자인으로 10가지 컬러로 구성했어요. 각각의 마스킹테이프를 겹쳐 붙이면 새로운 컬러를 만들어낼 수 있어 가장 즐겨 사용해요. 제게 마스킹테이프는 물감과도 같아요. 그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포스터컬러 뚜껑을 모티프로 라벨을 디자인했죠. 그 밖에 mt 단색 제품 등 작품에 어울리는 컬러가 있다면 가리지 않고 사용하고 있어요.

매장에 진열된 수많은 마스킹테이프는 질서를 갖춘 모습이에요. 배치에 공을 많이 들인 티가 나요.
항상 마스킹테이프가 사방에 빼곡하게 둘러싸인 곳에서 작업하는 것을 상상해왔어요. 롤드페인트는 오랫동안 꿈꿔왔던 로망을 현실로 재현해낸 공간입니다. 가장 많이 신경 쓴 부분은 진열장이에요. 당시 mt에서 출시되는 단색 마스킹테이프를 모두 넣을 수 있는 진열장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진열장을 어떻게 구성해야 각 제품이 흐트러지지 않고 정돈돼 보일까 고민했죠. 제품 하나가 유독 튀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균형을 지키면서요. 그러기 위해선 균일한 비율을 갖춘 정사각형의 격자 형태가 적합하다고 판단해 총 49칸으로 이뤄진 진열장을 제작했어요. 격자 형태에 따라 제품을 진열하니 가지각색의 마스킹테이프가 전체적으로 어우러지며 조화를 이루더라고요. 시각적인 즐거움도 더하고요. 또 마스킹테이프를 둘러싼 반듯한 면 덕분에 각각의 제품을 집중해서 볼 수 있어 만족스러워요.

창작의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

격자 진열장은 다양한 컬러를 채워 넣은 커다란 팔레트 같아 보여요.
마스킹테이프를 진열장에 넣어놓는 건 커다란 팔레트에 알록달록한 물감들을 채워 넣는 것과 같아요. 방문하는 손님들은 물감을 고르듯 마스킹테이프를 선택하고, 하얀 도화지에 채색하듯 저마다의 공간에 마스킹테이프를 붙여놓죠. 어딘가에 롤드페인트의 마스킹테이프가 붙어 있을 상상을 하면 오랫동안 혼자 작업하던 저에게 동료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컬러와 디자인, 두께 등이 다양해요. 마음에 드는 마스킹테이프를 고르려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방문해야겠네요.
맞아요. 마스킹테이프는 돌돌 말려 있을 때와 찢어서 붙였을 때, 붙이는 장소에 따라 각각 다른 느낌을 자아내요. 직접 방문해서 샘플을 사용해보며 충분히 둘러보는 것이 좋죠. 선택에 도움이 되고자 진열장 하단에는 일부 제품을 붙여놓은 샘플 노트를 배치해두었어요.

마스킹테이프 구입 외에 롤드페인트를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있다면요.
마스킹테이프를 직접 붙인 책갈피를 소지할 수 있는 무료 체험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어요. 또 마스킹테이프로 만든 그림엽서도 감상할 수 있어요. 원화를 촬영해 인쇄한 그림들이지만 마스킹테이프를 활용한 예술 작품으로 롤드페인트를 상징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해요.

작품 활동과 스토어 운영을 동시에 진행하며 일과 삶에 균형을 맞추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사실 스토어 운영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긴 힘들어요. 하지만 공간을 운영하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그간 종이 위에서만 맴돌던 저희 평면 작업 방식이 마스킹테이프를 만나며 입체적으로 변했어요. 또 마스킹테이프가 누군가를 만나 일상생활에 활용되고 있죠. 지금은 롤드페인트를 통해 마스킹테이프를 더욱 깊이 탐구하고 공부하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또 테이프를 계속 찢어 붙이는 행위에만 몰두할 수도 있겠죠. 그럼 또 그때 그것을 해내면 돼요. 지금 주어진 일들에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마스킹테이프는 주로 다이어리 꾸미기나 편지 봉투, 선물 포장 등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요. 알고 보면 그 쓰임새가 많다고요.
마스킹테이프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해요. 손님들에게 가장 추천하는 활용법은 테이프를 길게 찢어서 점착 면을 반으로 접어 끈으로 만들어 사용하는 거예요. 생각보다 꽤 강해서 몇 달이고 계속 매듭을 지으며 사용할 수 있어요. 또 인센스 스틱에서 태우고 싶은 부분의 위치에 마스킹테이프를 붙여놓으면 원하는 부분까지만 사용할 수 있고요. 제가 매일 하는 방법은 노트에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한 뒤 글자 위에 마스킹테이프를 찢어 붙여 형광펜처럼 하이라이팅을 하는 거예요. 이때는 두께감이 있는 것보다 5mm나 6mm 폭의 슬림한 제품을 사용하는 것을 추천해요. 조심스럽게 떼어내면 제거도 가능하고요. 이 밖에 버리기 아까운 종이 상자에 리폼 하듯 마스킹테이프를 붙이면 근사한 수납 상자로 변신합니다. 마스킹테이프 종류만큼 활용 범위는 정말 다양해요.

마스킹테이프는 '죽을 때까지 다 못 쓴다’는 말처럼 쓸데없는 제품으로 인식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롤드페인트를 운영하며 많은 사람이 마스킹테이프에 선입견을 갖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예쁘긴 한데 쓸모가 없다" "손재주 있는 사람들만 활용할 수 있다" 등 부정적인 평가도 받죠. 저는 마스킹테이프를 판매하고, 이를 활용해 작품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인식에 작은 변화를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흔하지 않은 도구인 만큼 손님들에게 더욱 친근하고 자세하게 소개하고, 다양한 활용 방식을 나누기 위해 노력하죠. 롤드페인트를 운영하기 전 다른 매장에 방문하면 제품의 디자인 등을 디테일하게 볼 수 없어 아쉬웠어요. 때문에 저희는 제품을 직접 사용해볼 수 있는 샘플을 마련해두었습니다. 또 방문하는 모든 분께 체험용 종이를 나눠드려요. 돌돌 말려 있는 마스킹테이프를 종이에 붙였다 떼었다 하며 자신만의 캔버스를 채워가길 바라는 마음으로요. 이 같은 행위를 통해 몰입과 창작의 즐거움을 경험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롤드페인트를 통해 어떤 가치를 느꼈으면 하나요.
좁은 방구석에서 마스킹테이프로 작품을 만든 지 10년이 넘었어요. 마스킹테이프를 붙였다 떼었다 수정하는 시간을 통해 그림을 하나씩 완성해나가며 성취감을 느끼고 자존감도 높아졌죠. 한번 칠하면 지울 수 없는 물감이나 먹과 달리 수정이 가능한 마스킹테이프는, 일단 시작해보라는 응원과 용기를 준 도구예요. 꼭 마스킹테이프가 아니라도 좋아요.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그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어요.

롤드페이트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은 뭔가요.
그간 마스킹테이프를 통해 스스로 불가능하다고 여기던 순간들을 여러 차례 극복해냈어요. 제가 체득한 긍정적인 경험을 롤드페인트를 찾아주시는 분들과 함께 오랫동안 나누고 싶어요. 또 마스킹테이프를 다양한 곳에 적용하며 롤드페인트만의 정체성과 고유함을 지켜나갔으면 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마스킹테이프 아트를 일상 영역으로 확장하는 거예요. 창작의 즐거움을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거든요.

#마스킹테이프 #롤드페인트 #다이어리꾸미기 #다꾸 #여성동아

‌사진 김도균 
‌사진제공 채민지

정세영 기자 sy2823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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