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접경지의 절규, 용산의 침묵 [전국 프리즘]
이준희 | 전국팀 기자
접경지 주민에게는 이중적인 정체성이 있다. 최전방에서 삶을 일구며 나라를 지킨다는 긍지와 남과 북의 경계에 살며 겨레가 언젠가 평화롭게 만날 공간을 가꾼다는 자부심이다. 기자가 만난 접경지 주민 중 상당수는 이 두가지가 모순되는 게 아니라 같은 방향이라고 믿었다. 남북관계 변화에 따라 생기는 갈등과 화해의 굴곡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이들이 삶의 터전을 지키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이유다. 어지간한 일에는 마음속으로 불안해할망정 겉으로 크게 동요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최근 이들의 변화가 심상치 않다. 정부와 국회에 대북 전단 살포 금지를 적극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물리적으로 살포를 막는 것도 마다치 않는다. 지난달 31일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국립 6·25전쟁납북자기념관에서 펼쳐진 광경이 대표적인 예다. 이날 접경지 주민들은 농사용 트랙터 20여대를 동원해 도로를 막아서며 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의 전단 살포를 저지했다. 주민들은 대북 전단 살포를 시도하는 납북자가족단체를 향해 “도저히 못 살겠다”고 절규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주민들을 움직이게 한 건 남과 북이 서로를 향해 틀어대는 확성기 소음이다. 지난 6월9일 정부가 대북 방송을 6년 만에 재개한 뒤 북한도 이에 맞서 대남 방송을 시작했다. 서로를 향해 쏘아대는 이 방송이 밤낮으로 울려 퍼지는데다 북한 쪽에서 단순한 선전방송이 아닌 귀신 소리, 쇳소리, 짐승 소리 등을 새벽 시간까지 틀어댄다. 심할 때는 소음이 90데시벨까지 올라간다. 주민들 사이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미치게 생겼다”(대성동 주민)는 호소까지 나온다.
그만큼 절박했다. 지난달 23일 경기도가 공개한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 대성동, 통일촌, 해마루촌 주민들의 호소를 들어보면 그 어려움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저희도 대한민국 국민 아니냐. 부귀영화를 바라는 게 아니다. 잠 좀 자게 해 달라. 평범한 일상을 원한다.” “2년 전 뇌출혈을 앓았는데 (방송이 나오고) 머리가 아주 터져나가고 뒷골이 뻣뻣해진다. 너무 아프니까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머리가 아프고 토하고 지끈지끈한다. 눈이 거의 20일째 퉁퉁 (부었다). 온몸이 정상이 아니니까 손발이 붓고 이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모르겠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는 수수방관이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해 김동연 경기지사, 김경일 파주시장, 유정복 인천시장 등이 잇달아 접경지 주민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도 대통령실은 침묵을 이어가고 있다. 대통령실의 브리핑, 보도자료, 연설문과 국무회의 발언 내용 등을 살펴봐도 지난 6월9일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결과를 전하며 대북 방송 재개를 발표한 것이 대북·대남 방송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흔적이다.
사실 대통령실은 이러한 사태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지난 5월10일 자유북한운동연합(대표 박상학)은 대북 전단 30만장을 풍선에 실어 북에 보냈다. 북한 당국은 이에 맞서 쓰레기 풍선 수백개를 남으로 날렸다. 탈북단체와 북한 당국이 몇차례 더 서로 풍선을 보내며 맞섰다. 그런데 탈북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를 ‘표현의 자유’라며 방관하던 정부는 6월4일 9·19 군사합의 효력을 정지하고 5일 뒤 대북 방송 재개를 결정했다. 탈북단체와 대통령실이 함께 장단을 맞추는 모양새다.
접경지 주민들은 탈북단체가 피운 불씨에 정부가 기름을 붓는 식으로 대북 방송 같은 군사작전을 실행하는 현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비교적 보수세가 강한 접경지에서도 윤석열 정부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실제 최근 강화군수 재보궐선거에서는 26년 만에 민주당 후보가 40% 넘는 지지를 얻기도 했다.
북한과 약 2㎞ 떨어진 강화군 송해면 당산리에서 만난 한 80대 노인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다.
“기자님, 제발 잘 써주셔서 우리 좀 살 수 있게 해줘요. 그런데 대통령이 아내 걱정하느라 우리 같은 농사꾼 챙길 새가 있을까 몰라.”
givenhapp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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