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점 앞에서 헤매다 점심 굶고, 카페 찾다가 1시간” ‘바늘구멍’ 경사로, 정부의 24년 죄책을 묻다
정부 “온라인 쇼핑 등 대안 존재”… 대법관들 “집에만 있으란 말인가”
“90평이면 웬만한 가정집 3~4배인데, 그런 큰 매장은 거의 가전제품 매장 빼고는 없죠. 동네 음식점·약국 이런 데는 휠체어 들어가지 말라는 거죠.”
2024년 10월2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장애인 접근권’ 관련 공개변론이 열린 시각, 대법원 유튜브 중계 채팅창에는 위와 같은 글이 올라왔다. 왜 이 시청자는 ‘90평’을 언급한 것일까.
1998년 4월 장애인의 권리를 증진하겠다는 목적으로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장애인 등 편의법)이 제정됐다. 그런데 이 법 시행령은 편의점 등 소매점의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를 ‘90평 이상에만’ 의무화했다. 본래 시행령은 ‘법의 실질적 시행’을 돕기 위한 하위 규범이지만, 이 시행령은 오히려 법의 실질적 집행을 가로막는 모순적 상황을 낳았다. ‘면적이 90평이 안 되는 98%의 편의점은 경사로를 설치 안 해도 된다’는 허가를 뜻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날 대법정 발언대에 선 원고 쪽 대리인 이주언 변호사(사단법인 두루)는 “1심 피고였던 편의점 편의시설(경사로 등) 설치율이 0.35%였다. (서울 전체 편의점 중에) 300㎡(90평) 이상인 곳은 1.4%였다. 시행령 개정에 통상 5~7개월이 걸리는데, 이 규정은 24년이 걸렸다. 인터넷에 경사로는 3만5천원~37만원에 판매된다”고 말했다. 2022년 4월 시행령이 개정돼 15평 이상 점포에도 경사로 설치가 의무화됐지만, 기존 존재하던 소매점엔 소급 적용되지 않는다.
“국가배상 인정돼야 행정부작위 방지할 수 있다”
그래서 조희대 대법원장 취임 이후 대법관 13명이 심리에 참여하는 첫 공개변론이 열렸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공개변론은 2021년 이후 3년 만이다. 동네 편의점·약국 등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위한 경사로 등 편의시설을 설치할 의무를 부여하지 않은 법령을 국가가 24년간 방치했다면 위법한지, 국가가 장애인에게 배상해야 할지 다투게 된 것이다. 이 국가배상소송의 원고는 김명학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등 지체장애인이다. 구 시행령이 설치의무를 면제해 장애인 접근권 침해 결과를 초래했는데, 국가가 이를 방치했음을 이유로 대한민국을 상대로 위자료 지급을 청구했다. 1심과 2심에서는 ‘대한민국이 시행령을 장기간 개정하지 않은 것이 설령 위법해도 고의성 과실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기각됐다. 원고들은 이에 불복해 상고했다.
그러나 이 차별구제 청구 소송은 ‘국가배상’ 사건이지만 목적은 ‘배상금’이 아닌 다른 데 있다. “원고들의 권리 침해 확인을 위한 최소한의 금액이 필요합니다. 손해배상 청구가 인용되지 않으면 국가가 위법행위를 했다는 사실, 그로 인해 접근권을 침해받고 고통받았다는 사실을 확인받지 못합니다. 국가배상이 인정돼야 행정입법부작위(행정기관이 법률에 따라 시행령을 제정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조처를 취하지 않은 상태)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소장에서 청구한 게 모두 다 인용돼야 한다는 게 아닙니다. 배상책임이 인정돼야 한다는 겁니다. 100만원 혹은 10만원이라도 인정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원고 쪽 변호인단)
이날 전동휠체어를 타고 참고인으로 대법정에 선 지체장애인 배융호 한국환경건축연구원 이사는 법 도입, 시행령 개정 방치 과정에서 느낀 바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98년 장애인편의법이 시행되면서 저를 포함한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은 삶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시행령에서 면적 기준을 제한하면서 장애인편의법의 입법 취지인 장애인 접근권이 축소됐습니다. 특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가야 하는 음식점·카페·약국·슈퍼마켓 등 대부분 소매점들은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올해도 저는 음식점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점심을 먹으러 돌아다니는 데 30분을 헤매다 단 한 곳도 찾지 못해 점심을 굶고 회의에 들어갔습니다. 지인을 만나 카페에 들어가려 했지만 1시간 동안 헤맸습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조희대 대법원장 “50%라도 해놓고 변론하라”
피고인인 정부 쪽은 행정입법부작위와 위법성이 인정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피고 쪽 정부법무공단 변호인단은 “위법한 행정입법부작위는, 법령에 의한 작위의무가 인정돼야 하고 그 부작위가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해 현저히 불합리해야 한다. 장애인 등 편의법 7조에서 대통령령으로 편의시설 설치 대상을 정하도록 하고 있고 8조에서 편의시설 종류는 대상 시설·규모·용도 등을 고려해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하고 있다. 즉 상당한 재량을 줘 작위의무는 인정되기 어렵다”고 했다.
특히 이날 피고 쪽 정부법무공단 변호인단은 변론 중에 “다른 권리에 비해 대체수단이 많다는 점을 말씀드린다. 직접적으론 소매점을 이용하는 대신 온라인점이나 장애인 편의시설이 갖춰진 대형마트를 이용할 수 있다. 혼자 활동하기 어려운 지체정신장애인에게 활동지원사를 지원하고 있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해 오경미 대법관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소매점뿐 아니라 머리 깎으러도 못 갔는데, 이십 몇 년간 이런 상태로 유지됐다는 건 활동을 할 수 없었다는 건데, 그걸 쉽게 대체되는 권리라고 말씀하시는 거에 좀 놀랐습니다. 온라인으로 주문하는 걸로 대체 가능하다고 말하는 건 장애인에게 집에만 있으면서 온라인으로 하라는 거고, 그때그때 필요한 카페나 편의점이든 뭐든 이용할 수 있는 일상생활에서의 즉자성을 전혀 구현하지 못하는 건데… 미리 계획해 활동지원사를 불러서 마트에 가는 게 대체적 권리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조희대 대법원장도 이렇게 되물었다. “(경사로 등 편의시설 설치율이) 50% 이상이라도 해놓고 우리는 할 만큼 했다고 해야 하는데 5%도 안 해놓고는 시행령에서 우리가 할 바를 다 했다고 하는 건 도저히 이치에 안 맞는 거 아닌가요. 법에서 비록 구체적 범위는 안 정했지만 너무나 입법의 의무를 게을리한 게 숫자 자체로 명백한 게 아닌지 물어보겠습니다.”
편의시설 설치비는 7만2천원
피고 쪽의 주장 중에 눈여겨볼 만한 것도 있었다. 참고인석에 나온 안병하 강원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경사로가) 설치됐다고 해도 통용되는 편의점 진열 방식과 진열대 사이 좁은 간격을 생각하면 장애인들의 상품에 대한 접근권은 실제로 보장되지 않는다. 단순히 편의점 내로 들어가는 게 접근권이 아니라면 이와 같은 점도 고려돼야 한다”며 “상품 진열 방식이나 진열대 간격까지 함께 규율했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는 한 시행령이 개정돼도 접근권 침해는 종료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피고 쪽 말대로 경사로가 설치됐다고 해도 접근권이 보장되지 않을까? 2024년 10월30일 오전 서울 동작구의 한 장애인 복지시설 인근에 있는 편의점을 찾아 직원에게 물었다. 경사로가 설치된 이 편의점은 복지시설과 3~5분 거리(도보 기준)에 있어, 하루에도 몇 차례씩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인 손님이 찾아온다. “요즘도 경사로가 없는 편의점이 있나요? 저는 저희처럼 다 있는 줄 알았는데. 휠체어 타신 어르신들 오시면 출출하니까 빵이나 우유 같은 거 사 드시죠. 휠체어가 안에서 다닐 수 있느냐 하는 문제보다, 사실 휠체어에 앉아 있으니까 손이 안 닿잖아요. 그래서 들어와서 어떤 물건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면 챙겨드려요. 카드 받아서 결제하고 영수증이랑 같이 드리고. 그러면 ‘아유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하시죠. 저만 그런 게 아니라 저희 직원들은 다 그렇게 해요.”(서울 동작구 편의점 직원 ㄱ씨)
대법정에서도 박영재 대법관은 이와 관련해 “인과관계 문제를 안 교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어차피 상품 접근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데 대해 원고 쪽 입장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원고 쪽 변호인단은 “접근권은 다른 여러 기본권을 실현하기 위한 ‘전제가 되는 권리’”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융호 이사의 말처럼 편의점 앞에서 지나가는 행인을 붙들고 도움을 청하는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일단은 안에 들어가야 거래를 할 수 있습니다. 장애인용 복도나 화장실이 없는 것도 문제긴 하지만, 그 이전에 일단 ‘들어가야’ 우유가 먹고 싶다고 하면 점원이 우유를 가져다줄 수 있죠. 들어가지 못하면, 도움을 주는 누군가가 없다면 아예 이용이 불가능합니다.”
이날 마무리 변론에서 원고 쪽 임성택 변호사(법무법인 지평)는 “2022년 시행령 개정 때 피고가 제출한 규제영향분석서를 읽어보면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다. 50㎡ 시설의 표준건축비는 1억240만원인데, 편의시설 설치비는 7만2천원이다. 이 점을 참고해주길 바란다. 경사로는 비단 휠체어뿐만 아니라 유아차, 임산부, 캐리어를 끄는 외국인 여행자, 무거운 짐을 옮기는 택배기사에게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교통사고로 중도장애인이 된 김순석씨가 1984년 9월 서울시장 앞으로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사건’을 언급했는데, 이 장애인의 유서에는 2024년에도 유효한 내용이 담겨 있다.
1984년 김순석 유서 “욕설은 견디지만 문턱은…”
“시장님. 왜 저희는 골목골목마다 박힌 식당 문턱에서 허기를 참고 돌아서야 합니까. 왜 저희는 목을 축여줄 한 모금의 물을 마시려고 그놈의 문턱과 싸워야 합니까. 스스로 부딪쳐보지 못하고 피부로 못 느껴본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까짓 신경질과 욕설이야 차라리 살아보려는 저의 의지를 다시 한번 다져보게 해주었읍니다. 하지만 도대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지 않는 서울의 거리는 저의 마지막 발버둥조차 꺾어놓았읍니다.”(1984년 9월22일 조선일보에 실린 김순석의 유서)
염보현 당시 서울시장은 사연이 보도된 뒤 간부회의에서 “조간신문에 눈물겹도록 기막힌 얘기가 쓰여 있다. 교통, 건설, 보사국 등 관련 부서 간에 충분한 협의를 거쳐 횡단보도나 건축물에 장애자들의 편의를 도울 수 있는 시설을 단계적으로 갖추도록 대책을 세우라”고 했지만, 이는 신문기사에 대한 응답이었고(책 ‘유언을 만난 세계’ 중에서) 현실은 달랐다.
24년 동안 장애인 등 편의법 입법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하고, 접근권을 오히려 가로막은 이 시행령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은 수개월 내 이뤄질 전망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판결 선고기일은 나중에 따로 결정해 통지하겠다”고 밝혔다.
손고운 기자 songon11@hani.co.kr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