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 줍는 노인 없는 일본…"종이는 쓰레기 아냐" 20년 앞서간 이유

도쿄(일본)=김성진 기자 2024. 11. 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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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는 코쿠후데쓰(종합)
[편집자주] 코쿠후는 일본말로 국부(國富)를 뜻한다. 일본은 쓰고 버린 종이가 국부라고 여긴다. 일찍이 1970년대에 폐기물 관련법에 '폐지는 폐기물이 아니다'라 못 박았다. 아무도 안 가져가려는 폐기물이 아니라 자원이란 말이었다. 이후 종이의 재활용 체계를 정비해 지금은 '아파트가 많아 재활용을 잘한다'는 한국보다 적어도 20년은 앞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길거리에 폐지 줍는 어르신도 없다. 이런 일본의 종이 재활용 체계를 하나씩 소개한다.
日 종이 분리수거장에 수상한 안내문..."쓰레기통 아닙니다"[르포]
일본 도쿄 모 대학 근처의 공동주택 지하 종이수거장. "쓰레기통이 아닙니다",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라 써 있다. 그 뒤로 골판지와 신문지, 잡지, 우유팩, 그밖의 종이를 따로 버리는 5개의 수거함이 있다./사진=김성진 기자.

지난 2일 일본의 한 종이 분리수거장에 뜻밖의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다 쓰고 버린 폐지를 모은 수거함인데 "쓰레기통이 아닙니다"라 적혀 있었다. 옆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란 문구도 있었다. 하지만 수거함에는 흰 종이와 펼쳐진 우유팩, 과자상자 등이 버려져 있었다.

◆ 폐지가 아니라 고지, 국부

일본 도쿄의 종이 수거업체 아라이상점에 골판지(왼쪽)와 모조지(고급 아트지인 백상지·오른쪽)가 쌓여있다. 두 종이 모두 다른 종이로 재활용한다. 자원으로서 가치 때문이 일본은 다 쓴 종이를 버려야 하는 폐지가 아니라 오래된 고지라 부른다./사진=김성진 기자.

일본은 다 쓴 종이를 한국처럼 쓰레기라 보지 않는다. 버리는 종이, 폐지라 부르지도 않는다. 대신 오래된 종이라는 뜻의 '고지'라 부른다. 일찍이 1970년대에 일본은 '폐기물 관리에 관한 법'에 종이는 "폐기물 처리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자원으로 관리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폐지는 소각·매립하지 않을 시 신문지와 인쇄용지, 각종 박스, 휴지 등으로 재활용할 수 있다. 6~8번 재활용할 수도 있다. 이에 세계 각국은 폐지를 확보하려고 경쟁한다. 전세계에서 한해 수출입되는 폐지는 약 2000만톤이다. 일본은 약 200만톤을 수출한다.

일본에서 폐지 수출업을 하는 이명호 고지재생촉진센터 국제위원은 "일본에서 폐지는 경제적 가치가 있다는 유가물(有價物), 국가 경제에 중요한 코쿠후(國富·국부)라고 본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지난해 종이를 약 2200만톤 생산했고 이중 약 1700만톤(77%)을 회수해 재활용했다.

◆ 5가지 분리배출…신문, 우유팩 따로 버린다

일본 도쿄의 또 다른 종이수거장. 신문과 잡지를 나눠버린다./사진=김성진 기자.

일본은 종이를 △골판지 △우유팩 △신문지 △잡지 △잡고지(기타 종이) 5가지로 버린다. 가정집과 공동주택마다 수거함을 다섯개 두고 한 종류의 종이만 버린다. 수거업자나 지방자치단체가 월~금 닷새 동안 하루에 한 종류만 수거한다. 정해진 날이 아닌 날에 버린 종이는 수거하지 않는다.

이렇게 분리배출하는 이유는 '순도' 때문이다. 순도는 종이 재활용에 가장 중요한 요소다. 제지회사가 휴지를 만들기 위해 폐우유팩 더미, 신문지를 만드려 폐신문지 더미를 납품받았는데 이물질이 섞여 있으면 향후 재활용해 만드는 종이의 품질도 자연스럽게 떨어진다. 일본은 폐골판지, 폐신문지, 폐우유팩 등의 순도가 90%를 넘는다. 한국은 손도 못댈 정도로 여러 지종이 섞여 온다. 그래서 일본의 폐지를 수입해 쓴다.

일본이 수준 높은 분리배출을 할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로 '국민성'이 꼽힌다. 종이 수출업체 다이와 시로의 도쿠마사 야구라 대표는 "일본인은 예부터 무엇이든 버려지면 '아깝다'는 생각이 강했다"며 "재활용을 열심히 하려는 국민성, 폐지의 순도가 높지 않으면 받지 않는 제지회사들의 엄격한 기준이 일본 고지의 품질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지원도 큰 역할을 했다. 일본 정부는 1974년 발족한 고지재생촉진센터가 민간단체로서 성격이 강함에도 행정·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해당 센터는 전국에 출장소를 설립하고 의무교육에 올바른 분리수거법을 포함해 폐지의 수집·처리 체계를 뒤바꿨다.

국내의 한 폐지 수집상은 "한국은 골판지와 우유팩 등 온갖 종이가 섞여 온다"며 "일본처럼 폐지의 순도를 높이려면 교육도 강화하고 지금보다 더 적극적인 정부와 지자체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토로했다.

같은 85%, 한국도 종이재활용 잘한다?…일본에 20년 뒤처진 이유

한국의 종이 재활용률은 일본과 맞먹는다. 하지만 한국의 높은 수치가 눈속임이라는 지적도 적지 않다. 수거하는 폐지의 양은 많지만 온갖 종이가 뒤섞여 재활용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폐지가 제지사에 납품되기까지 고물상들이 중간마진을 남기는 유통구조를 간소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 폐신문지 뭉텅이에 신문은 고작 20%

일본의 종이 분리수거장. 수거함 하나에 종이 종류가 하나씩 버려져 있다. 일본은 종이를 다섯 종류로 분리배출한다./사진=김성진 기자.

흔히 쓰이는 '종이 재활용률'의 공식 명칭은 '종이 회수율'이다. 회수한 폐지의 양을 종이 소비량으로 나눠 계산한다. 지난해 수치는 일본과 한국이 85.6%로 같았다. 한국은 수거되는 폐지의 양이 많아 회수율이 높았다. 주거 형태의 대다수가 아파트인 영향이었다.

하지만 폐지의 활용성은 떨어진다. 일본에 최소 20년 뒤처졌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한국은 일본 만큼 종이를 분리배출하지 않는다. 이에 폐지의 순도가 떨어진다. 예컨대 신문지 제조사는 납품받은 폐신문지 베일(뭉텅이)에 신문 함유량이 높아봐야 20%다. 이 때문에 순도 높은 일본산 폐신문지를 국산과 섞어 쓰는 실정이다. 우유팩도 씻지 않고 배출하기 때문에 보관 과정에 20~30%가 썩어 일본의 폐우유팩을 수입해야 한다.

일본은 폐지의 순도가 95% 아래로 떨어지면 제지회사가 받지 않는다. 한국은 지종에 따라 순도가 10%만 돼도 높다고 평가하는 실정이다.

◆ 무게 부풀리려 물 뿌리기도

일본과 한국 가정집의 폐지 수거 시스템/그래픽=이지혜

일각에는 '종이를 한 데 버려도 나중에 국내 수거업자들이 종류별로 분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폐지 중에 재활용선별장으로 향하는 물량은 극히 일부다.

대부분의 폐지는 아파트 부녀회나 입주자대표회의와 계약을 맺은 '고물상'이 수거한다. 어르신들이 주운 폐지도 고물상으로 향한다. 고물상은 전국에 2만여곳 있다. 이들은 폐지를 한동안 모아놨다가 전국의 470여 압축상에 보낸다. 압축상은 폐지의 부피를 줄여 제지회사로 납품한다.

폐지가 압축상에 다다르기까지 많게는 3곳의 고물상을 거쳐야 한다. 고물상들은 전국에 소상과 중상, 대상으로 이어지는 1~3중의 폐지 유통구조를 수십년간 유지해왔다. 중상과 대상은 나까마(중간유통상)라 불린다. 이들을 통하지 않고는 폐지를 납품받을 수 없다. 이에 압축상들은 나까마를 상대로 치열한 영업경쟁을 벌인다.

1~3중의 유통단계에서 폐지 품질은 대체로 악화한다. 보관 과정에 비를 맞거나, 기껏 분리한 골판지와 골판지가 아닌 종이가 뒤섞인다. 고물상들이 중량을 늘리기 위해 인위적으로 물을 뿌리기도 한다. 압축상들은 협상력이 약해 폐지의 품질 하락에 자유로이 문제제기를 못하는 실정이다. 폐지 수급량이 떨어지는 장마철 등에는 중량이 부풀려진 폐지도 납품받아야 영업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품질 하락의 손해는 압축상과 제지업계가 떠안는다.

일본은 고물상, 나까마가 없다. 폐지 수거체계가 크게 △집단수거 △행정수거 둘로 나뉜다. 집단수거는 아파트나 마을의 자치회와 계약을 맺은 압축상이 폐지를 바로 수거하는 구조다. 행정수거는 인구밀도가 낮은 곳의 폐지를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수거하거나 보조금을 지급하고 압축상이 하게 하는 방식이다.

한국에 폐지 줍는 노인들의 수익이 불안정한 데는 고물상이 1~3중으로 중간마진을 남기는 유통구조의 영향도 크다. 일본처럼 폐지의 유통구조를 점차 간소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국내 한 제지업계 관계자는 "일본은 지자체가 압축상에 보조금을 지급해 폐지를 수거하게 한다"며 "한국은 보조금은커녕 지자체가 수거한 폐지를 압축상에 판매한다. 폐지의 고질적인 품질하락 문제를 고치려면 폐지가 고물상을 거치지 않고 신속히 압축상에 오도록 유통구조를 조금씩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47년 제지업 원로 "日 폐지 참 깨끗해…학교서 가르친 덕"
최병민 깨끗한나라 회장(오른쪽)이 지난달 30일 일본 도쿄의 폐지 수거업체 아라이상점에서 일본 폐지들을 둘러보고 있다. 왼쪽은 한국의 폐지 압축상들의 단체인 한국제지원료재생업협동조합의 정윤섭 전무./사진=김성진 기자.

47년 동안 제지업에 종사한 최병민 깨끗한나라 회장(72)은 일본 폐지의 품질이 "한국은 아직 못 쫓아갈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좋은 원료를 써야 좋은 종이가 나오는데, (재활용) 과정을 개선하려면 폐지 수집상과 제지업계뿐 아니라 정부도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지난 6일 일본의 폐지 수집상인 아라이상점을 견학한 후 본지와 만나 "일본은 원료(폐지)가 참 깨끗하다"며 "소학교(한국의 초등학교)부터 올바른 분리수거 방법을 가르친 덕"이라고 평가했다.

최 회장은 깨끗한나라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듬해인 2020년 한국종이자원진흥원의 이사장에 올라 폐지의 활용성을 높이기 위해 힘쓰고 있다. 진흥원은 일본의 고지재생촉진센터를 모티브로 2011년 발족했다.

일본은 종이를 골판지와 신문지, 잡지, 우유팩, 그외 종이 다섯가지로 분리배출한다. 우유팩은 물로 씻고, 가위로 오려 버린다. 최 회장은 "일본은 가정에서 종이를 깨끗이 씻고 분리하니 제지공장에 들어가면 (활용성이) 최고"라며 "우리 정부도 분리수거가 제대로 되도록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한국은 국토의 70%가 산이지만 산업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경제림은 적다. 종이의 원료인 펄프를 80% 이상 수입해야 한다. 제지업계는 폐지의 활용성을 키우는 것을 숙원으로 여겼다.

최 회장은 정부에 한국제지자원진흥원을 더 적극적으로 지원해달라고 촉구했다. 해당 단체는 종이 재활용을 촉진하고자 이사회에 산업통상자원부와 환경부도 참여하지만 재정 지원은 전무하다. 일본 고지재생촉진센터는 정부의 재정·행정 지원이 활발하다.

최 회장은 수거한 종이가 비에 젖지 않도록 국내 폐지 수집상들의 건폐율 기준도 완화해달라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한국 제지산업에 관한 제도가 상당 부분 일본의 제도를 받아들였는데 규제는 더 많다"고 호소했다.

◆ "인니·중국 무섭게 치고 올라와"

최 회장은 글로벌 시장에서 국내 제지업계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중국은 품질이 많이 좋아졌고 인도네시아는 아직 한국보다 떨어지지만 빨리 쫓아온다"고 평가했다.

그는 10여년 전 중국의 최대 제지업체인 나인드래곤을 방문했을 때 공장 부지가 한국 공장들의 10배 수준이었고 설비가 전부 자동화됐으며 고가의 유럽산 생산설비도 갖춰 "중국이 참 무섭다"며 "앞으로 글로벌 제지시장은 중국에 달렸다"고 전망했다.

최 회장은 제지업계와 폐지 수집업계, 그리고 정부의 3자 협업을 당부했다. 최근 수출가격 인상으로 폐지 상당수가 동남아시아로 판매돼 국내에서 수급이 불안정했던 점을 거론해 "원료업계로선 수출 가격이 높으면 수출할 수 있다"면서도 "(제지산업의 발전) 하나의 목적으로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일본과 중국 제지업계에도 "동남아시아가 우리를 앞서기 시작했다"며 "세 나라가 교류와 협업을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일본)=김성진 기자 zk00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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