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물고 새로 지을 집 [이진순 칼럼]

한겨레 2024. 11. 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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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하고 오만한 통치자만 쫓아내면 국민이 원하는 세상이 올 것인가? 지도자의 선의에 기대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인가? 촛불항쟁 이후 문재인 정부는 최다 의석을 가지고도 결정적인 개혁의 기회를 흘려보내면서 촛불시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탄핵하면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까?”에 대한 불신과 무력감이 시민들 마음속에 납덩이처럼 가라앉아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3년 3월21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머리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진순 |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입주한 지 3년도 안 된 집에 시커멓게 곰팡이가 피고 벽에 금이 가고 여기저기 물이 새면 집은 안식할 거처가 아니라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그대로 견디자니 생지옥이고 고치려 들면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니, 당장 먹고살기 급급한 살림살이에 이 환란을 어찌 감당할지 막막하다. 이럴 때 입주자의 선택은 두 가지다. 급한 대로 썩어가는 도배지와 장판만 갈고 집을 팔아 다음 입주자한테 떠넘기는 방법, 혹은 싹 뜯어내고 노후한 골조와 벽체를 정비해서 재건축하는 방법.

슬프게도 우리에겐 첫번째 선택지가 없다. ‘급매 대한민국, 입주자의 해외 이주로 싼값에 내놓음’이라고 써 붙일 수도 없지 않은가? 팔아치우고 갈아탈 수도 없는 집, 내 자식들이 대대손손 살 수밖에 없는 집이라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도배, 장판 바꾼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곰팡이는 장판 밑에서 더 맹렬하게 번식할 것이고 갈라진 벽은 계속해서 틈을 벌려 붕괴를 초래할 것이고 우리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흉가에 머물다 어느 순간 압사의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명태균 녹취록이 등장한 이후, 정국은 급물살을 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11월을 ‘김건희 특검의 달’로 설정하고 3차 특검법 처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조국혁신당은 17개 탄핵 사유를 담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준비 중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19%로 추락하고 대구·경북의 지지율마저 전국 평균 이하로 곤두박질치자(한국갤럽 10월29~31일 조사) 국민의힘 한동훈 대표도 지난 4일 대통령 사과와 인적 쇄신을 촉구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같은 날 한덕수 총리가 대독한 국회 시정연설에서 “정부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4대 개혁을 완수하겠다”며 일방통행식 언변만 늘어놓았다. 7일 예정된 대통령 기자회견에서 결자해지의 자세로 진정 어린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면 ‘언 발에 오줌 누기’에 그치고 말 것이다. 여기다 대고 김건희 특검에 대해선 일언반구 없이 김 여사의 대외활동 자제, 특별감찰관 도입만 읊어대는 한동훈 대표의 대응도 안이하기 짝이 없다.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대통령이 결단할 때라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결단을 앞두고 깊은 고민에 빠져 있기는 국민도 마찬가지다. 국민의 분노와 불신은 임계점을 넘은 지 오래인데 8년 전처럼 선뜻 탄핵 촛불을 들고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현재 헌법재판소의 구성이 보수 우위라서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해도 인용될 가능성이 확실치 않다고 우려하는 사람도 있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더 근원적인 것은 탄핵 이후의 시나리오에 대해서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무능하고 오만한 통치자만 쫓아내면 국민이 원하는 세상이 올 것인가? 지도자의 선의에 기대서 이룰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인가? 촛불항쟁 이후 문재인 정부는 최다 의석을 가지고도 결정적인 개혁의 기회를 흘려보내면서 촛불시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탄핵하면 무엇이 얼마나 달라질까?”에 대한 불신과 무력감이 시민들 마음속에 납덩이처럼 가라앉아 있다.

2016년 최순실(최서원)의 태블릿피시가 공개되면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10월 말에 17%, 12월에 5%로 급락했고 여당인 새누리당의 지지율은 반토막이 나고 줄곧 새누리당에 뒤처지던 민주당의 지지율은 두달 사이 새누리당의 2배를 거뜬히 넘어설 정도로 급등했다.(갤럽 2016년 조사)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 지지율이 19%로 떨어지고 반대 여론이 72%에 이르는 현재, 국민의힘과 민주당의 지지율은 32%로 동률이다. 상황에 따라 앞으로 달라질 수 있겠지만, 반윤석열 여론이 민주당 지지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깊이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이 와중에 금융투자소득세 폐지로 당론을 정한 민주당의 행보는 대체재로서의 정치적 정체성마저 의심하게 한다.

대다수 국민은 이미 알고 있다. 지금 이 만신창이 집에선 발 뻗고 잘 수가 없다. 문제는 이 흉가를 허문 자리에 어떤 집을 지을 건지 그 대안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탄핵이든 하야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대통령의 개과천선이든, 개헌을 비롯한 전면적 쇄신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시민사회가 전국민적 여론을 수렴하기 위한 공론화위원회 방식의 범국민적 새판 짜기 계획을 제안하고 국회가 여야 공히 이에 화답한다면 어떨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제도적인 쇄신안 준비를 병행해야 싹 허물고 제대로 바꿀 수 있다. 꿩 잡는 게 매다. 혼돈의 시대, 새집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들게끔 국민을 선도하는 자가 진정한 리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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