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풍경] 붉은 단풍이 흐르고, 초록 폭포수 물들고… 산이 꽃이다
봄여름은 산등성이를 거슬러 오르고 가을과 겨울은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린다. 단풍으로 물든 산은 먼발치에서 바라만 봐도 좋지만 기어이 진경 속으로 빠져들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높지만 쉽게 닿을 수 있고, 깊지만 험하지 않은 무주의 두 단풍 명소, 적상산과 덕유산 칠연계곡을 찾아간다.
적상산, 단풍만큼 창연한 이야깃거리 가득
해발 1,034m 적상산(赤裳山)은 가파르게 떨어지는 절벽이 붉은 치맛자락처럼 곱다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멀리서 보면 눈앞을 가로막는 육중한 수직 절벽이지만 그 속으로 들어가보면 치마처럼 폭이 넓고 유려하다. 적상산의 가을은 그래서 극적이다.
깎아지른 절벽 위 산꼭대기는 의외로 제법 넓은 평지다. 이런 지형을 이용해 양수발전소가 들어선 정상 부근까지 차로 쉽게 갈 수 있다. 구불구불 산자락을 오르는 도로 양편으로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황홀한 단풍 터널을 형성하고 있다.
양수발전은 밤에 남는 전력을 이용해 하부댐의 물을 끌어올려 상부댐에 저장했다가 전력 사용이 많은 낮에 물을 떨어뜨려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 방식이다. 산꼭대기에 제법 큰 호수 적상호가 자리한 이유다. 정상에 오른 차량은 호수를 거의 한 바퀴 돌아 반대편 끝자락의 전망대에 닿는다. 높이보다 지름이 더 커 보이는 원통형 전망대는 사실 발전소 수로의 압력을 완화시켜주는 조압수조다. 외벽을 두르는 계단으로 오르면 수조 옥상이 전망대다. 동쪽으로 멀리 덕유산 능선이 우람하게 출렁거리고 바로 앞에 적상호 주변 도로를 따라 단풍이 유난히 곱다.
북측으로는 산줄기가 급하게 흘러내린다. 지난 1일 현재 발아래 정상부의 나뭇잎은 곧장이라도 타오를 듯 붉게 물들었고, 아래쪽 산등성이는 아직 푸른 기운을 유지하고 있었다. 진홍에서 초록까지 서서히 변해가는 가을 산의 면모와 계절의 변화가 한눈에 감지된다. 요즘같이 일교차가 큰 날에는 되도록 이른 아침에 오를 것을 추천한다. 하부댐 무주호에서 피어오른 안개가 구름이 되어 능선을 넘고, 먼 골짜기에도 스멀스멀 수증기가 피어오른다. 파도를 타는 산줄기마다 구름을 품고 있으니 옛 화가의 산수화가 따로 없다. 몽환적이고 오묘하다.
적상산의 볼거리는 단풍과 장쾌한 풍광만이 아니다. 양수발전소가 준공되기 훨씬 전 가파른 바위 지형을 이용해 산성을 쌓았고, 외부에서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고도 있었다.
광해군 6년(1614) 적상산성 안에 실록각이 창건되고, 4년 뒤 새로 편찬된 선조실록이 처음으로 봉안됐다. 인조 12년(1634)에는 묘향산 사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이 이안됐고, 5년 후에는 선원각을 별도로 세워 조선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을 봉안했다. 그러나 한일병합조약 후인 1911년 사료는 서울의 이왕직장서각으로 이전되고 적상산 사고는 폐쇄된다. 이왕직(李王職)은 일제가 ‘이왕가(李王家)’와 관련한 사무를 담당하던 기구다. 장서각에 보관하던 실록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 김일성대학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폐쇄된 적상산 사고 터는 폐허로 방치되다 양수발전소 건설로 끝내 물에 잠겼는데, 이때 남아 있던 유구를 위쪽으로 옮겨 현재 실록각과 선원각을 복원해 놓았다. 적상호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새로 세운 두 전각 내부는 조선왕조실록과 무주의 역사를 알리는 전시실로 꾸며 놓았다.
사고에서 약 1㎞ 떨어진 곳에 안국사가 있다. 고려 시대인 1277년 승려 월인이 창건하고,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명해 절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 절도 원래 양수발전소 수몰지구에 위치했는데, 1991년 현재 자리로 이전해 복원했다. 안국사 마당 아래에 ‘적상산성 호국사비(赤裳山城護國寺碑)’가 세워져 있다. 호국사는 적상산 사고를 관리하고 수호하는 사찰이었는데, 1949년 여수·순천 사건 때 전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명목상 안국사가 호국사를 대신하게 된 셈이다.
호국사비 부근에 적상산성의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안쪽 성벽은 높이가 어른 키에 미치지 못하지만 바깥쪽은 천 길 낭떠러지다. 이르게는 백제 때 쌓은 것으로 추정하는데, 조선시대 들어 임진왜란과 후금의 등장으로 내륙 방어 시설의 중요성이 더해지고 조선왕조실록의 보존 문제가 논의되며 적상산성도 본격적으로 정비됐다.
안국사에서 산길로 약 800m 이동하면 안렴대(按廉臺)에 닿는다. 고려 시대 거란이 침입했을 때 삼도(전라, 경상, 충청) 안렴사가 진을 치고 피란했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돌출된 바위에서 한 발짝만 내디디면 끝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다. 이곳에서는 적상산의 서쪽 지세가 한눈에 파악된다. 발아래 대전통영고속도로가 까마득한 골짜기를 가로지르고, 그 너머로 진안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또 산수화를 그리고 있다.
적상산에서 내려오다 중턱쯤에 무주머루와인동굴이 있다. 양수발전소를 건설할 때 뚫은 579m 작업 터널을 활용한 관광시설이다. 무주는 110여 농가에서 연간 600톤의 머루를 생산하는 국내 최대 머루 재배지다. 동굴은 연중 14~16도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한다. 6개 지역 업체에서 생산하는 머루와인을 시음하고 구입할 수 있다.
짧은 산행, 깊은 여운… 덕유산 칠연계곡
적상산이 장쾌한 산수와 어우러진 단풍을 감상하는 곳이라면, 덕유산 자락 칠연계곡은 아기자기한 폭포와 어우러진 단풍 계곡이다. 명칭부터 7개의 폭포에서 유래한다. 덕유산 안성탐방지원센터에서 칠연폭포까지는 약 1.5km, 끝부분을 제외하면 차량이 다닐 정도로 넓고 완만한 흙길이다. 현재 그 길 위에 낙엽이 겹겹이 쌓이며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등산은 탐방지원센터에서 시작되지만 계곡은 약 2km 아래 용추폭포에서 시작된다. 도로에서 바로 보인다. 소나무와 단풍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암반에서 하얗게 폭포수가 쏟아지고 아래에 검푸른 소가 형성돼 있다.
무주군 자료에는 이곳을 시작으로 칠연폭포에 이르기까지 멋들어진 풍경을 칠연계곡 11경으로 소개하고 있다. 제1경 용추폭포에는 씀씀이가 인색한 노랑이를 도사가 혼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제2경 은반대는 계곡 끝 마을의 넓은 반석이다.
제3경은 11경 중 유일하게 자연 경관이 아닌 비극의 사적이다. 탐방안내소 지나 바로 왼편에 구한말 의병들의 무덤인 칠연의총(七淵義塚)이 보인다. 진안·임실·순창 등지에서 전과를 올린 신명선 의병 부대는 1908년 칠연계곡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150여 명이 전부 사망하고 말았다. 흩어진 유해는 1969년 수습해 합장했고 1976년 전라북도 기념물로 지정되며 ‘칠연의총’이라 불리고 있다.
이곳부터 본격적으로 폭포와 소가 이어진다. 옥황상제가 용추폭포의 도사에게 ‘덕을 얼마나 쌓았느냐’ 물었다는 제4경 문덕소, 암반을 미끄러진 맑은 물이 큰 소를 이루었다는 제5경 함박소, 나무하던 도끼를 던지고 글공부를 위해 상경한 산골 청년의 이야기가 서린 제6경 도끼폭포, 옥황상제가 도사에게 폭포 하나에 1년씩 수도를 명했다는 제7경 명제소가 차례로 이어진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하얗게 쏟아지는 물줄기와 깊고 푸른 물웅덩이가 비경을 빚는다. 안타깝게도 별도의 팻말이 없어 지점을 특정하기 어렵고 대충 이곳이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다.
탐방지원센터에서 약 1.2km 오르면 칠연폭포로 가는 갈림길에 ‘조난기’ 비석이 세워져 있다. 1977년 이곳에서 조난당한 군 장성 일행이 후일 등산객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세웠다고 적혀 있다. 목적지이자 제8경 칠연폭포는 갈림길에서 약 300m, 계단을 포함한 오르막길이다. 7개 폭포와 소가 계속해서 이어지는데, 명제소의 도사가 신선이 되기 위해 1년씩 도를 닦았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제9경 사랑담, 10경 선녀탕, 11경 천의폭포는 바로 칠연폭포에 포함된 물줄기와 소다.
칠연폭포에는 3개 지점에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제일 꼭대기 신선의 옷을 펼친 것 같은 천의폭포에서 하얗게 물보라가 부서지고, 검푸른 웅덩이를 이뤘던 물줄기는 다시 미끄러져 또 깊은 구덩이로 떨어진다. 지난달 31일 에메랄드빛 소 주변으로 이미 낙엽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면 소용돌이치는 폭포수에도 흠뻑 단풍이 들 것으로 보인다. 왕복 1시간, 짧지만 여운이 깊은 가을 산행이다.
칠연계곡에서 가까운 곳에 ‘정원산책’이라는 카페가 있다. 해발 560m 폐목장 부지를 가꾼 정원 카페다. 입장료는 음료수 값으로 대신한다. 카페 창밖에 가을꽃이 만발해 있고, 그 너머로 장수에서 무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넘실거린다. 억새와 조경수가 어우러진 넓은 잔디밭과 아늑한 그늘에 차를 즐길 수 있는 테이블이 놓여 있다. 사람이 많지 않은 평일이라면 책 한 권 들고 가서 가을날의 서정을 즐기기 좋은 곳이다.
무주=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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