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의 窓] 하루가 다르게 짧아지는 ‘예술’
과연 햄릿이 유언을 남겼던가? 배우 조승우의 주연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셰익스피어 연극 ‘햄릿’을 보다가 문득 들었던 의문이었다. 전반 공연 시간만 1시간 45분. 웬만한 영화 한 편이 끝날 시간이지만, 20분의 중간 휴식 이후에 다시 1시간에 이르는 후반부가 이어졌다. 총 3시간의 연극 마지막 장면에서 극중 덴마크 왕궁은 이미 복수와 음모의 연쇄 폭발로 선혈이 낭자하다. 그런데 쓰러진 왕자 햄릿은 절친 호레이쇼에게 의미심장한 유언을 남긴다. 이국(異國) 노르웨이의 왕자에게 덴마크 왕위를 물려주라는 당부였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만 겨우 외우는 불성실한 연극 관객이니 기억의 창고에 남아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꼼짝없이 엉덩짝을 붙이고 앉아 있었던 고통의 대가는 적지 않았다. 결말 장면에서 셰익스피어의 이 고전이 난생처음으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복수든 타협이든 스스로 내분과 분열을 해결할 능력을 지니지 못한 권력은 결국 양도될 수밖에 없다는 또 다른 해석의 길이었다. 뒤늦게 집에 돌아와서 번역본을 뒤적이니 똑같은 구절이 멀쩡하게 적혀 있었다.
흔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한다. 수명과 작품 길이는 엄연히 다르지만, 요즘 세상은 정반대 방향으로 굴러간다. 인생 수명은 점점 길어지는데, 예술과 문화 상품의 길이는 하루가 다르게 짧아지는 것이다. 10여 분의 동영상이 폭발적 인기를 누리던 것도 어느새 구문(舊聞). 지금은 60초 안팎의 짧은 영상을 일컫는 숏폼(short form)이 대세다. 당연히 우리의 인내심은 날이 갈수록 줄어든다.
올 초 대학생들 앞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생겼을 때, 꼭 묻고 싶었던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우선 영화나 드라마를 1.5배 빠른 속도로 본 적이 있는가? 절반 정도가 손을 들었다. 풍경 묘사나 자막 없는 장면들을 건너뛰면서 본 적은 있는가? 다시 절반 정도가 손을 들었다. 마지막으로 영화나 드라마 본편 대신에 요약본만 보고 넘어간 적이 있는가? 대부분 손을 들었다. 살짝 과장해서 세 가지 질문에 한 번도 손을 들지 않았던 사람은 딱 한 명, 나 혼자뿐인 듯했다.
빨리 감기와 건너뛰기 시청도 실은 변화와 적응의 결과다. 국내에도 소개된 1974년생 일본 칼럼니스트 이나다 도요시의 책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의 결론이다. 온라인 영상 서비스(OTT)의 급부상으로 21세기의 인류는 평생 봐도 모자랄 분량의 영상 콘텐츠를 보유하게 됐다. 하지만 서너 시간의 연극과 오페라는 여전히 우리에게 일러준다. 삼시 세끼를 패스트푸드로 때울 수 없듯이 우리 영혼의 식단(食單)을 빨리 감기와 건너뛰기로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엉덩이뼈가 욱신거리고 무릎이 저려오는 고통이 있어야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들도 있는 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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