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늙어가는 대한민국… 미래 논의에 ‘현장’과 ‘젊은 세대’가 없다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의사 2024. 11. 6.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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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상훈

얼마 전 대통령 직속 위원회를 그만뒀다. 고위 관료로부터 나가줬으면 한다는 말을 들었다. 일정을 잡기 위한 첫 미팅은 참석했지만, 이후 정례회의를 한번도 나가보지 못하고 그렇게 된 것이다. 짧게나마 정부의 정책 의사 결정이 이뤄지는 과정을 체험했다. 이 과정이 흥미로웠고, 사회적 시사점이 있기에 이번 칼럼에서 다뤄 보고자 한다.

우선, 필자로서는 맥이 풀리는 일이었다. 위촉 과정이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필자 본인의 재산, 범죄 사실을 조회했다. 그뿐만 아니라 초등학생 아들의 학교 생활까지 검증했다.

왜 필자는 위원회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을까? 젊은 현장 실무자는 참석이 어려운 ‘회의의 제약’ 때문이다. 매주 금요일 오후 2시에 서울 한복판, 정부청사로의 현장 참석이 필수였다. 회의 일시가 잡힌 과정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평일 오전 10시 또는 오후 2시라는 10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방식이었다. 누군가 금요일 오후 2시를 이야기했다. 형식적인 의견 수렴을 거쳐 “안 되는 분 없나요?”라고 하고 정해졌다. 형식상 다수결이기는 했지만 일단 정해지니 고정이 됐다. 그러나 필자는 병원 당직을 포함한 진료 업무를 수행하거나 강연 등 외부 일정을 위해 이동하는 경우가 많아 물리적 회의 참석은 무리였다.

그래픽=박상훈

이 문제가 위촉 과정에서 충분히 소명됐다고 생각한 건 필자뿐이었던 것 같다. 실무진에게서 현장 참석을 요구하는 독촉을 몇 차례 받다가, 고위 관료로부터 ‘최후 통첩’이 왔다. 필자는 계속 말했다. “화상회의 도구를 이용해 원격 접속을 하겠다. 그러면 참석에 아무 문제가 없다. 이것이 어렵다면 텔레프리센스(원격 진료나 화상 회의에 사용하는 카메라와 컴퓨터가 탑재된 로봇)를 제공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술 도구의 사용은 불가능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치 ‘허생전’에서 허생이 계책 하나를 준 후 거절당하니 제2, 제3의 계책을 주었지만 계속 거절당하는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업이 있어서 평일 낮에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아 하는지요?”

이번 일련의 과정을 돌이켜볼 때 필자는 한 지점이 궁금해졌다. 매주 금요일 오후 2시 서울에서 열리는 회의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평일에 일하지 않는 사람이고, 거주지는 수도권이며, 장애 등으로 거동이 불편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꽤 적을 것이다. 그런데 위원 구성을 보면 ‘50~60대로 수도권 대학의 교수 또는 국책연구기관 근무자’ 식으로 비슷비슷한 프로필을 가진 이유가 이 때문이리라. 물론 해당 회의에 현장 참석할 수 있는 분들의 높은 열의와 역량을 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아니다.다만, 필자의 결론은 이렇다. 현재의 위원회 방식은 현장에서 일하는 실무자와 지방 거주자의 참여를 물리적으로 배제한다. 이 위원회들에서 국가 정책들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특정 집단이 과잉 대표된 정책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만들게 된다.

큰 그림을 그려 볼 때 한국의 미래를 위협하는 문제는 명확하다. 인구 감소와 수도권 집중, 기후변화. 지정학적 리스크와 안보, 식량, 에너지 등이다. 미래 정책을 만드는 조직이라면 이런 사회적 이슈들을 놓고 각 세대와 계층을 비롯한 여러 집단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야 한다. 그렇다면 평일 업무 시간 반나절을 매주 이동과 회의 참석에 사용할 수 있는 현장 실무자란 누구란 말인가. 이렇게 정책 의사 결정에 현장이 배제되는 단적인 사례로서, 의료 시스템이 9개월째 무너져가는 현실을 국민은 목도하고 있다.

실무를 맡은 사람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이판사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판은 경전 공부 등 교리를 공부하는 스님이고 사판은 절의 행정 일체를 맡는 스님이니 실무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가장 세속과 먼 공간에서도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필요했음을 말해준다. 단순히 학계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 역시 임상 의사이자 연구자로 실무와 학계에 동시에 발을 걸친 사람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현장의 목소리 또한 중요하며, 정책을 만드는 데 반영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안팎의 공적인 위원회는 다양한 인구 집단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어야 한다. 젊은 세대, 비수도권 거주자, 장애인 등도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만들 필요가 있다. 국회미래연구원은 연령대별로 미래에 대한 인식에 뚜렷한 양극화가 관찰되며, 공공 정책을 결정할 때 2030세대의 참여 비율을 높여야 한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래야 일자리, 주거 문제, 공동체의 부재 등 젊은 세대가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요인들을 논의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위원회는 오랜 기간 안정적인 교수 생활을 해온 50~60대의 남성으로 구성된, 소위 ‘압정형’ 인구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위원회가 과연 젊은 세대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평범한 사람들의 고충을 이해할 수 있을까? 서울 한복판에서 결정되는 미래 정책은 ‘서울 공화국’을 더욱 공고히 하지 않을까?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연령과 배경을 갖춘 현장 경험자들이 정부 위원회에 참석할 수 있는 기술적인 방법은 이미 존재한다. 문제는 기술이 있는데도 정작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동안 다들 원격 접속을 해봤으니 익숙하지 않음을 탓할 수도 없다. 위원회 담당자와 소통하면서 필자는 현장에서만 회의해야 하는 이유를 수차례 물었다. 답을 얻지는 못했다. 필자의 경험상 정부 조직은 변화를 극도로 싫어하니 그 선상에서 답을 짐작할 뿐이다.

다시 강조하자면, 필자는 ‘미래’ 분과에 속했었다. 미래 정책을 만드는 자리에 최신 기술을 사용할 수 없는 것, 그 결과 평일 오후 2시에 현장 참석이 가능한 사람만이 참여할 수 있는 것, 그렇게 우리의 미래를 위한 정책이 만들어진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되어 가는 것일까. 미래는 유한 계급의 전유물이 아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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