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에서 만난 나의 ‘의대 반수’ 후배들[오늘과 내일/신광영]
A 씨는 명문 공대생들의 의대 도전이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했다. 의대 정원이 단번에 1500명이나 늘어난 건 이들에겐 ‘입학 때 성적만 나와도 의대에 갈 수 있다’는 청신호이기 때문이다. 하던 대로만 해도 합격 확률이 높은데 안 할 이유가 있겠냐는 것이다. 더구나 내후년부턴 의대 증원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이공계생들이 많다고 한다.
공대 출신 일타강사의 씁쓸한 요즘
“공대생은 잘해 봐야 대기업 월급쟁이인데 의대생은 꼴찌 해도 연 2억, 3억은 벌잖아요.”
반수생들이 이런 말을 해올 때면 한때 공대 자부심이 있었던 A 씨도 딱히 할 말이 없다. 이들이 공대에 오기까지 창의와 도전을 중시하는 ‘공대적인’ 삶의 방식을 장려받은 적이 거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한두 문제만 삐끗해도 갈 수 있는 대학이 달라지는 세상에 적응하며 ‘전문직이 최고’란 말을 듣고 자란 학생들이 대학생이 됐다고 진취적으로 바뀌긴 어렵다.
현실과 계산에 밝아야만 적자생존 하는 요즘 청년들에게 국가의 미래가 이공계에 달려 있다는 말은 이들이 살아온 관성과는 동떨어진 얘기다. 요즘 많은 의대생들이 전공의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개업해 돈 되는 미용의료에 나서는 것도 우리가 우대해 온 인재들이 그런 효율을 추구하는 데 비교우위인 이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정년 이후가 다들 불안하고, 워라밸도 챙겨야 하니 공부 수재들은 의사라는 모범 답안을 영리하게 찾아내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공계가 완전히 죽은 건 아니다. 수학 과학에 남다른 열정과 재능이 있고, 정해진 탄탄대로 대신 판을 흔드는 창업을 꿈꾸는 인재들도 적지 않다. 석박사를 마칠 때까진 시간이 걸리고 연구실에선 늘 시행착오와 씨름하지만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과학기술 지원만큼은 굳건할 것이란 믿음이 이들을 지탱했다.
윤석열 정부가 역대 어느 정권도 하지 않았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을 감행한 것은 그런 점에서 뼈아픈 실책이다. 연구 과제가 사라져 수입이 끊기고 뒤늦게 진로를 고민하는 선배들을 보면서 적지 않은 공대생들이 ‘역시 믿을 건 자격증뿐’이란 생각을 굳혔을 것이다. 그렇게 이공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정부가 뒤이어 꺼내든 게 의대 대폭 증원이었으니 공대생들에겐 ‘이참에 의대로 갈아타라’는 정책적 신호인 것이나 다름없다.
인재의 의대 쏠림은 의사에겐 과잉 보상하고 엔지니어는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기울어진 인센티브 체계가 만든 현상이다. 최근 서울대 공대와 KAIST에서 휴학·자퇴가 늘어나는 건 정부가 이 뿌리 깊은 문제를 섬세하게 다루지 않은 탓이 크다. 지금은 의정 갈등에 가려져 있지만 공대의 붕괴는 두고두고 국가의 기술 근간을 흔들 것이다. 안 그래도 상당수 공대생들이 전문직이 되거나, 더 큰 기회를 찾아 해외 연구소나 빅테크 기업으로 떠나는데 이런 정책 실패까지 겹치면 국내 산업을 이끌 엔지니어들은 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공학도들, 공대 안에서 빛나게 해줘야
A 씨에겐 공대 시절 친했던 동기 5명이 있다. 이 중 전공을 살린 친구는 대기업에 다니는 한 명뿐이다. 의사가 2명, 로스쿨을 거쳐 변호사가 된 친구가 2명이다. 공대 경력을 내세워 대형 로펌에 들어간 두 친구는 지식재산권 전문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공대 밖으로 나가면 이공계 출신인 게 브랜드가 되는데 정작 공대 안에선 답을 찾기 어려운 게 요즘의 현실이다. 이대로 뒀다간 공대가 ‘사(士)자 직업’으로 가는 환승역이 돼버릴 수도 있다. 공학 인재들이 공대 안에서 빛날 수 있도록 이들에 대한 사회적 존중을 되살리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신광영 논설위원 n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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