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표, 책에 역사성과 미술적 가치 불어넣어” [나의 삶 나의 길]
장서표는 책 소유자 나타내는 예술품
문자와 그림 결합하면서 예술 장르로
1991년 재중동포 판화가 통해 알게 돼
1993년에 국내 최초로 장서표전 열어
‘생명판화’로 길을 넓히다
판화는 대중에 다가가는 최선의 예술
장서표는 책 찾게 하는 매개물로 역할
밑동 잘려도 싹 틔워내는 나무에 경외
예술관 사람에게서 생명으로 넓어져
자전거를 세운 그가 주의사항을 일러준다. 의외의 자상함에 부성애가 느껴진다. 뒷모습을 보이며 멀어져 가는 선생에게서 가을 냄새가 난다.(소설가 김훈)
그는 시 ‘고래를 기다리며’를 통해 말한다. 장생포 바다에서 이제는 사라진 고래를 기다리는데, 오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기다리는 것이 삶이기도 하지만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어깨를 들썩이는 바다가 바로 한 마리의 고래일지도 모른다고, 이미 고래는 우리의 가슴속에 있다고.(시인 안도현)
“장서표(Ex-Libris·엑스 리브리스)는 책의 소유자를 나타내는 작은 예술품입니다. 동양에서는 도장 형태의 장서인을, 서양에서는 종이에 새긴 판화를 책에 붙여 사용했어요. 대개 5∼9㎝ 크기로 제작하는데, 일반 판화와 다른 점은 라틴어 ‘Ex-Libris’라는 국제공통표기를 삽입하는 것입니다. Ex(엑스)는 영어로 ‘···로부터’를 뜻하는 ‘from’(프롬), Libris(리브리스)는 ‘books’(북·책) 또는 ‘library’(라이브러리·도서관)이에요. 소장자의 이름을 써넣는 것도 필수 요소죠. 여기에 서재명, 제작 또는 소장 연대를 추가하기도 하고, 책 내용, 관련된 시, 격언, 경구들을 적기도 합니다. 단순히 표식에 그치지 않고 문자와 그림을 결합하면서 예술성과 실용적 목적을 아울러 지닌 판화예술의 한 장르로 발전했습니다.”
김훈의 장서표에는 그를 싣고 세상을 돌아본 자전거가 들어가 있고, 소설가 이순원의 것에는 그의 대표작 무대인 은비령이 새겨져 있다. 흑곰이 시집으로 이루어진 나무 위에서 하늘에 시를 쓰는 모습은 서형오 시인의 별명을 반영한 것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신경림 선생이 ‘사람은 더불어 혼자 산다’는 말씀을 남기셨는데, 무척 인상 깊어서 헌정한 장서표에 더불어 홀로 길을 가다 망중한에 있는 새 한 마리를 그려 넣었습니다. 정호승 시인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인생의 사막을 통과해야 한다. 그 사막에 낙타가 없다면 얼마나 황폐할까’라고 하셔서 책을 한아름 실은 낙타를 새겼어요.”
종(鐘)이 없는 사찰 미황사 주지 금강의 장서표는 큰 종이 자리를 차지했다. “크고 좋은 종을 꼭 마련하라는 기원입니다.”
‘그리스·로마신화’를 옮긴 신화연구자이자 소설가인 이윤기는 반인반수(半人半獸)가 되었다.
낚시광인 평론가 하응백은 붕어가 노는 어항을 얻었다.
“춤을 즐기는 소설가 김인숙을 그릴 때, 전화를 걸어와 고양이로 바꿔 달라기에 고양이와 춤추는 소녀를 함께 남겼던 기억이 납니다.”
평소 다량의 독서를 즐기던 남궁산은 세계 여러 나라 장서표를 들여온 뒤 국내 동료 판화가들에게도 장서표 작업을 독려하다가 마침내 1993년 ‘세계의 장서표전’이라는 문패를 내걸고 국내 첫 장서표전을 열었다.
1995년에는 인사동 현화랑에서 첫 장서표 개인전을 개최한 뒤, 2010년 대전대학교 교수와 교직원들의 장서표만으로 ‘대전대 사람들’이라는 전시회를 펼쳤다. 2012년에는 전북작가회의 회원들의 장서표로 기획전 ‘전북 사람들’을 진행했다.
지금까지 400여 점 장서표 작품을 내놓았고, 장서표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글로 묶어 단행본으로 펴내기도 했다.
책이 사라지지 않는 한 장서표는 영원할 것이다. 책에 역사성을 부여하면서 미술적 가치를 드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과 실용,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장서표는 책을 더 가까이 하도록 이끄는 매개물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사실 미술은 특정 계층이 향유하는 장르예요. 돈이 없는 사람은 즐길 수가 없거든요. 저는 1000만원짜리 한 작품을 만들기보다는 1만원짜리 1000개를 만들어 퍼뜨립니다. 달력이 좋은 예이지요. 한 명이 즐기는 예술보다 1000명이 누리는 예술이 더 가치롭다고 믿습니다. 판화야말로 대중에게 다가가는 예술이에요.”
‘사람 좋은’ 남궁산은 사람들 속에서 행복하다. 누구나와도 잘 어울리고 친해지며 교분을 오래 이어가는 능력이 출중하다. 장서표는 그가 맺은 인연과 우정의 소중함을 기록하는 표현방식이기도 하다. 그의 장서표를 소장한 이들은 그와 술잔을 기울이고 노래를 섞었으며 세상사를 논한 이들이다. 장서표를 통한 만남은 단지 사람에 머물지 않고 더 넓은 환경과 생명으로 나아간다.
‘생명-시’(2019) 판화에 자필로 적어나간 자작시 ‘삶’의 한 구절은 그의 예술과 삶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다.
“나무들은/ 위로 위로 자신을 밀며/ 하늘을 향해 사는 것 같지만/ 나무와 나무 사이/ 꽃 피고 이파리 지는 그곳/ 삶은 그 사이에 있지요”
작품 ‘생명-마음의 그루터기’를 들여다보자. 큰 나무 밑동이 댕강 싹둑 잘려나갔다. 몸통이 없으니 나무는 영락없이 죽은 꼴이다. 그런데 웬걸, 밑동에서 곁가지 하나가 삐죽 자라 싹을 틔웠다. 민둥산의 큰 땅에 뿌리 박은 밑둥치에서 뻗어올린 가지는 참 싱싱하다. 생명을 싹 틔우려는 나무의 죽음도 숭고하다. 싹 틔운 나무의 생명을 환하게 밝히는 푸른 하늘과 ‘밝달’의 하얀 기운.
1987년 판화가로 나선 이래 장서표전 등 30여 차례 개인전과 100회가 훌쩍 넘는 단체전에 참여해 온 남궁산은 최근 들어 판화 작업보다는 저술에 집중하고 있다. 색의 역사를 다룬 청소년 교양서 ‘문명을 담은 팔레트’(2017)를 출간해 1만1000여 부의 판매고를 올린 바 있는 그는 출판과 판화의 역사를 다룬 책과 미술 관련 교양서를 준비하고 있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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