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전원 배경의 부부 초상화가 폭로하는 건… 땅을 사랑한 정략결혼[양정무의 미술과 경제]
英 게인즈버러 ‘앤드루 부부’ 초상화… 대농장 배경으로 자신감 있는 표정
화가는 앤드루 부인 가문의 채무자
그림으로 갚으며 불편한 감정 녹여
그림 오른편으로 펼쳐진 광활한 대지 모두는 앤드루 부부가 소유한 땅이다. 크기는 3000에이커(약 12km²), 대략 여의도 면적의 4배가 넘는 대토지이다. 이 거대한 땅은 두 부부의 결혼으로 합쳐진다. 둘은 이 그림이 그려지기 2년 전 그림의 왼쪽 배경에 보이는 교회에서 결혼한다.
신랑 로버트 앤드루(1725∼1806)는 지주 계층인 젠트리 계급으로 그의 아버지는 로버트를 상류층에 편입시키기 위해 같은 지역에 살던 사업가의 딸과 1748년에 결혼시킨다. 신부 프랜시스 메리 카터(1732∼1780)는 포목 사업과 부동산 사업을 하던 윌리엄 카터의 딸이다. 둘의 결혼은 젠트리 가문과 사업가 가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에서 보이는 부부간의 거리감은 이들의 관계가 정략적으로 맺어진 것이라는 점을 추측하게 한다.
신랑 로버트와 신부 프랜시스의 아버지는 각각 에섹스 지방의 오베리(Auberies)라는 곳에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둘이 결혼하면서 신부의 아버지 윌리엄 카터가 소유한 절반의 토지를 로버트에게 유산으로 증여하기로 약속하였다. 결혼 2주 후 윌리엄 카터가 사망하면서 로버트 앤드루는 오베리 토지의 단독 소유주가 된다. 그림 오른편에 자리한 넓은 땅은 바로 이렇게 탄생한 오베리의 대농장이다.
앤드루 부부는 자신들의 결혼으로 만들어진 토지 앞에 자신감 넘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로버트 앤드루는 사냥 재킷을 입고, 주머니에는 꼬인 화약과 탄환 주머니가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팔 아래에 긴 총신의 엽총을 들고 발치에는 사냥개를 데리고 있는 여유로운 모습은 배경의 넓은 토지와도 잘 어울린다.
아직 18세에 불과한 새댁 앤드루 부인은 야외보다는 가정집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파란색 비단 드레스를 입고 꼿꼿이 앉아 있다. 흥미롭게도 부인의 무릎 부분은 미완성으로 남아 있다. 새로 태어날 아이를 위해 남겨졌다는 해석도 있고, 뜨개질을 그리려다가 미처 완성하지 못했다는 추측도 있다.
사실 이 그림을 그린 게인즈버러는 앤드루 부인과 다소 불편한 관계였다. 그의 아버지가 앤드루 부인의 아버지인 윌리엄 카터에게 돈을 빌렸다가 갚지 못하게 되자 게인즈버러가 빚을 대신해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종의 채무 변제용 그림이 되는 셈이다. 그림 속 앤드루 부인의 깐깐한 표정이 화가와 주인마님 간의 채무 관계를 방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화가는 주인어른과 동창이다. 로버트 앤드루와 게인즈버러는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다. 앤드루가 게인즈버러보다 두 살 많았고, 사회적 신분도 높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친하기는 어려웠을 테지만 둘은 분명 서로에 대해 잘 알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화가는 주인어른과도 별로 좋은 감정은 아니었던 것 같다.
로버트 앤드루가 들고 있는 장총과 축 늘어진 화약 자루가 앤드루의 무능한 성기능에 대한 비유라는 해석도 있고, 앤드루의 왼편에 그려진 당나귀를 멍청이라는 욕설이라고 보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주문자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게인즈버러가 개인적 감정을 그림에 녹였다는 것이다.
게인즈버러가 숨겨놓은 코드를 앤드루 부부가 눈치챘는지 이 그림은 그려진 이후 200여 년간 이 집안 창고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다 1927년 게인즈버러 탄생 200주년 기념 전시에 출품되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지금은 18세기 영국 농촌 지배층의 가치관을 담은 명작으로 재평가되면서, 영국 내셔널 갤러리의 소장품 중 가장 유명한 부부의 초상화가 되었다. 18세기 영국 농촌의 토지 합병부터 채무 관계까지 담고 있다는 점에서 미술과 경제의 접점을 넓힌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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