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국내서 유럽 연구비 문 열었다”…암 씨앗세포 연구로 첫 선정
상위 10% 받는 유럽 연구비, 국내서 첫 선정
6년간 150억원 연구비 지원 받아
“암세포의 전 단계인 ‘암 씨앗 세포’ 연구”
한국이 글로벌 과학 연구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우리가 연구비를 대서 외국 연구자와 공동 연구하는 데에서 나아가 해외 연구비로 공동 연구를 하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유럽연합(EU)의 세계 최대 연구비 지원 프로그램인 ‘호라이즌 유럽(Horizon Europe)’이 대표적인 예이다. 국내에서 첫 테이프는 구본경 기초과학연구원(IBS) 유전체교정연구단 단장이 끊었다.
유럽연구위원회(ERC)는 5일 구본경 단장을 포함해 2024 시너지 그랜트(연구비)에 선정된 연구진들을 발표했다. ERC 시너지 그랜트는 호라이즌 유럽의 대표적인 연구 프로그램으로 여러 분야가 결합한 다학제적 연구를 지원한다. 구 단장은 이번에 국내 한국인 연구자로는 처음으로 시너지 그랜트에 선정됐다. 구 단장 선정을 계기로 국내 연구자들이 국제적 성과를 낼 수 있는 길이 한층 넓어졌다.
대전 IBS에서 만난 구본경 단장은 “단순한 연구비 수혜가 아니라 한국의 연구가 학문적으로 인정받은 결과”라며 “ERC의 시너지 그랜트는 혁신적인 연구자들이 모이는 중요한 플랫폼으로, 국내에서 최초로 선정돼 영광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ERC 프로그램의 시너지 그랜트는 2~4명의 연구자가 모여 연구자 1명으로는 할 수 없는 도전적, 혁신적인 연구를 하는 프로젝트다. 올해 ERC 시너지 그랜트에 지원한 연구팀은 548개 팀으로 지난해의 약 400개 팀보다 훨씬 많았다. 이 가운데 상위 10%에 해당하는 57개 팀이 선정됐다. 구 단장은 2015년 영국에서 연구할 때 신진 연구자를 지원하는 ERC의 ‘스타팅 그랜트’에 선정된 데 이어 이번에 시너지 그랜트에도 이름을 올렸다.
구 단장은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벤저민 사이먼스 교수, 마리아 알콜레아 교수, 독일 드레스덴 공대의 다니엘 스탕거 교수와 함께 앞으로 6년 동안 총 1000만 유로(약 150억원)의 연구비를 지원받는다. 한국에는 연간 6억원의 예산이 배정된다. 구 단장은 “과제 기간에는 별도의 평가 과정이 없어, 말 그대로 믿고 연구를 맡기는 것”이라며 “학계애서 인정받았던 연구자들이 선정되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연구에 몰두해 성과를 내도록 한다”고 했다.
6년 동안 연구진은 ‘암 씨앗 세포(Cancer Seed Cell)’ 개념을 기반으로 암의 발생과 성장 메커니즘을 규명할 예정이다. 구 단장은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는 분열할 때마다 돌연변이가 생기는데, 이 중 극히 일부만이 면역과 같은 방어 시스템을 뚫고 암세포가 된다”며 “이 세포들이 암세포가 되기 전 단계를 암 씨앗 세포라고 정의하고, 암세포가 되기까지 메커니즘을 연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구 단장은 ‘모자이크 유전학’이라는 새 분야를 개척해 암 발생 초기 단계를 연구해 왔다. 세포의 유전자 각각을 다른 형광색으로 표시하고 암 유전자가 어떻게 변하는지 추적하는 연구다. 암 씨앗 세포 연구에도 같은 방법을 쓸 계획이다. 여기에 생쥐와 인간의 암 씨앗 세포를 연구하는 의사과학자 스탕거 교수와 암 발생을 연구하는 암생물학자 알콜레아 교수, 수학 모델을 이용해 암세포가 생기기까지 과정을 분석·예측하는 물리학자 사이먼스 교수가 힘을 합친다.
ERC의 그랜트는 호라이즌 유럽의 세부 분야 중 다학제적 협력을 통해 혁신적인 기초과학 연구를 수행하도록 지원하는 ‘필러 1′에 해당한다. 지난해 한국이 가입한 호라이즌 유럽 프로그램인 ‘필러 2′와는 다르다. 필러 2는 글로벌 문제 해결을 위한 공동 연구에 한정된다. ERC 그랜트가 더 기초과학에 집중하다 보니 세계적인 성과가 속출했다. 실제로 ERC 그랜트를 지원받고 노벨상을 받은 연구자는 14명에 달한다.
구 단장은 “시너지 그랜트의 주목적은 기초과학적인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것이지만, 잡초가 자라는 과정을 연구해 제초제를 개발했듯 암세포의 시작을 연구하다 보면 항암 신약도 개발할 수 있다”며 “암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암 씨앗 세포를 제거하는 약을 먹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껏 ERC 그랜트에 선정된 1만여 팀에서 비회원국의 비중은 미국과 중국, 일본이 가장 높다. ERC 그랜트를 받은 국내외 한국인 연구자는 12명에 불과하다. 구 단장은 그중 국내서 시너지 그랜트를 처음 받았다. 구 단장은 “아직 국내 연구자 대부분이 ERC 그랜트에 대해 잘 모르거나 지원하기를 망설이는 것 같다”며 “자신의 연구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알리며 소통하고, 직접 발로 뛴다면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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