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숲길] 내 마음의 거울

문형 소설가 2024. 11. 5.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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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형 소설가

올가을은 홍천 가리산에서 만끽했다. 깊은 계곡, 붉게 물든 가리산 자연휴양림 소형 산막에서 혼자 먹고 뒹굴었으니. 내친김에 가리산 정상 등산도 하리라 작정했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들어오다 언뜻 읽은, 가리산 이름에 대한 의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리는 볏가리, 노적가리처럼 볏단이나 땔나무 따위를 단으로 묶어 차곡차곡 쌓아둔 더미나, 그 더미를 세는 단위를 뜻하는 말인데·….

부산서 멀리, 홍천까지 온 이유는 잡다한 생각 좀 내려놓고 쉬려고 온 게 아닌가. 그럼에도 쉴 틈 없이 또 가리산 정상에 오른다? 하기야 백패킹 다니다 보면 스스로 모순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여유 있는 도보여행을 해보고자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와선, 정작엔 쉬지 않고 이곳저곳 다 둘러보려는 욕심이 불쑥불쑥 드는 까닭이다. 이번엔 홍천강 따라 조성된 너브내길을 걷겠다는 명목으로 왔지만, 내심은 세파에 시달린 몸을 좀 추스르고 싶어서였다. 하여 일부러 소형 산막을 예약했건만, 하룻밤도 지나기 전에 가리산 정상을 오르고 싶은 욕심이 생겼으니. 희망도 쌓이면 욕심 가리가 되기 일쑤.

가리산 등산은 보름 후에 다시 와서 하기로 마음을 달리 먹고 높은 곳으로 오르거나 쌓는 곳이 아닌, 낮게 흐르거나 내어놓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홍천 9경 생태탐방로 중 용소계곡 길을 걷는 것으로. 용소계곡 트레킹은 자연휴양림 산막에서 출발하면 가리산길과 샘재길에 이어 경수 마을 길, 용소계곡 숲길, 군유동길로 이어지는데 연장 22㎞에 이른다. 내가 걷는 보통의 산행길은 하루 20㎞, 둘레길은 27㎞를 걷을 수 있으므로 악조건이 아니라면 넉넉한 하룻길이었다. 그래, 가보자!

도로변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본격적인 용소계곡 숲길에 들기 전 경수 마을을 지나며 안내판을 보았다. 마을 앞에 거울처럼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 경수(鏡水) 마을이라 한다나. 사실이지 계곡 초입부터 물이 맑기는 했다. 출렁다리를 건너 계곡 중간쯤 들어서자 정자가 보였다. 물소리 청량한 데다 인적도 드문, 그야말로 심심 계곡이었다. 한참을 앉아서 쉬고 있다 바로 그 자리에 텐트를 쳤다. 뭐, 오늘 안에 끝까지 가야 할 이유도 없으니, 마음이나 내려놓자 하고.

야영 준비를 끝내고, 가래떡으로 허기를 채우며 밤 기온과 내일 날씨를 알아보려고 휴대폰을 켰다. 아뿔싸, 휴대폰 통화 불가 지역인지 화면에 안테나 표시가 안 뜨고 대신 금지 마크가 뜨지 않는가. 기왕이면 이 순간, 이 자리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문명 이기도 버리라는 하늘의 뜻인지.

아닌 게 아니라 요즘 세태를 보면 하루 중 대부분을 너나없이 스마트폰에 빠져서 산다. 백패킹을 떠나도 그렇다. 예정지를 정할 때부터 지역 정보 및 교통수단을 알아보기 위해 수십 번도 더 휴대폰을 들여다본다. 길 찾기나 지역 정보를 알아보려고 켜는 일도 있지만, 실상은 하릴없이 뒤적이는 때가 더 많다. 쉬려고 산막에 왔으면서도 누워선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욕심을 내려놓는 건 둘째 치고 눈이나 귀를 좀 쉬게 해야 하는데 그것부터가 잘 되질 않는다. 도심에서 매일매일 자동차 소리에 시달리고, 성난 사람의 잡소리를 듣거나 온갖 쓰레기 더미를 보아왔는데도 말이지. 하나 이곳 용소계곡 숲길은 청량한 물소리와 바람 소리에 단풍도 완연해, 자연적으로 나 자신을 방임할 수밖에.

밤이 되어 텐트 안으로 들어와 랜턴 불빛 아래서 내 삶을 반추해 보았다. 도착한 시각이 오후 3시쯤이었는데, 내일 아침 8시께 출발한다고 보면 17시간은 휴대폰조차 터지질 않으니 외부와의 소통은 완전히 끊긴 상태. 소중하게도, 환갑까지 살아온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될 줄이야.


그런 의미에서 잡념에 찌든 때와 욕심 가리를 하룻밤 동안이나마 온전히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 휴대폰 통화 불가 표시가 내 마음의 거울이나 진배없다. 어떤 순간, 그 무엇이 나를 일깨우기만 한다면 그게 바로 마음의 거울 아닐쏜가. 쉼표나 느낌표보다 금지 표시가 나를 더 돌아보게 만든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으니, 이만한 심경(心鏡)도 없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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