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같은 어제는 지우고 내일을 다려요”…무대에 오른 소년범들의 다짐
“얼룩 같은 어제를 지우고 먼지 같은 오늘을 털어내고, 주름진 내일을 다려요”
5일 오후 서울 중구 국립극장 무대에서 앳된 얼굴의 남학생 20여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뮤지컬 <빨래>의 한 장면을 노래하자 객석에선 함성이 터져나왔다. 무대와 객석을 메운 이들 300여명은 모두 비행을 저질러 ‘6호 보호처분’을 받은 청소년들이다. ‘6호 보호처분’은 민간의 소년보호·복지시설에 6개월 이상 입소하는 것으로, 소년원에 갈 정도의 비행을 저지르진 않았지만 풀어주면 주변의 영향으로 다시 비행을 저지를 우려가 있을 때 내려진다.
서울가정법원은 이날 ‘Super Style, 2024 : 우리의 무대는 계속될거야’라는 주제로 소년보호기관 청소년 문화제를 개최했다. 올해로 12회를 맞은 청소년 문화제는 ‘6호 보호처분’을 받은 청소년들의 교화와 재비행을 예방하기 위해 서울가정법원, 의정부지방법원, 인천가정법원 등 6개 법원이 대법원의 후원을 받아 주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시설 6곳의 청소년 300여명이 참석했고, 그중 140여명이 치어리딩, 뮤지컬, 합창, 밴드공연 등 직접 공연을 준비했다.
대전 ‘효광원’의 청소년들은 이날 170여km를 달려 공연장을 찾았다. 40인승 대형버스 3대에 나눠타고 오전 8시에 출발해 3시간을 달려왔다고 했다. 효광원 관계자는 “이른 아침 출발하느라 다들 김밥 한 줄밖에 못 먹고 왔지만 다들 눈빛이 빛난다”며 “무대에 오르고 친구들을 힘껏 응원하겠다는 목표가 생긴 덕분”이라고 했다. 효광원의 ‘새벽 밴드’가 붉은색 해병대 티셔츠를 입고 크라잉넛의 ‘밤이 깊었네’ 노래를 시작하자, 객석에 앉은 아이들은 큰 소리로 함께 떼창했다.
밴드 공연에서 기타를 맡은 A군은 “다들 악기를 처음 배웠는데 연습 기간은 두 달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3곡을 연주하기 위해 하루도 빠짐 없이 연습했다”고 했다. 공연을 지도한 권영석씨는 “시설에 온 한 친구에게 기타를 가르쳤는데 그 날에만 3~4시간을 연달아 연습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걸 느꼈다”며 “음악을 하며 아이들이 성격도 나아지고, 음악에 가능성을 보이기도 해서 나 역시 아이들과 계속 열심히 하고 싶어졌다”고 했다.
공연을 준비하는 데 우여곡절도 많았다고 한다. 무대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의 수가 정해져 있다보니, 자체적으로 오디션을 보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치어리딩 공연을 준비한 ‘마자렐로 센터’의 한 여학생은 “연습이 힘들어서 우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서로 달래주면서 했다”며 “어려운 동작을 서로서로 잡아줄 때 뿌듯했고, 누군가와 함께 한다는 기분을 처음 느껴봤다”고 했다.
이날 각 법원의 소년부 판사들도 다수 공연장을 찾았다. 공연 사이 쉬는 시간, 한 남학생은 자신의 재판을 맡았던 판사를 찾아 “판사님 저 기억하시나요, 요즘은 집에 늦게 안들어가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며 안부를 묻기도 했다. 법원 관계자는 “판사들이 새로운 기회와 가르침을 줬다는 생각에 애착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며 “연락을 주고 받으며 나아지는 모습을 지켜봐달라고 하는 일도 있다”고 했다. 한 가정법원 판사는 “아이들의 서툰 노래지만 같이 박자를 맞춰 노래하는 모습에 왠지 눈물이 난다”고 했다.
서울가정법원 관계자는 “비행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 무대에 서는 경험을 통해 성취감도 느껴보고, 또래 친구들과 갈등을 해결하고 협동하는 방법을 차근차근 배울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며 “단 한 명의 청소년이라도 이번 행사를 통해 선도가 된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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