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비한 이가 왕이었다” 조선의 ‘정치개혁’ 끝내 실패하다
새벽, 모든 게 물거품으로 변했다. 독립협회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진 것이다. ‘고종의 배신’에 분노한 민중들은 ‘대한제국판 촛불집회’라 할 수 있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끈질기게 맞섰다. 고종은 12월25일 무력을 동원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했다. 전제군주권을 둘러싼 개혁 세력과의 처절한 투쟁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이는 고종이었다.
1898년 3월10일 만민공동회를 통해 러시아의 군사·재정 고문을 몰아낸 윤치호는 갑신정변(1884) 이래 조선의 시급한 과제였던 ‘정치 개혁’을 완수하려 했다. 그가 택한 길은 고종의 전제군주권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인 ‘의회’를 만드는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 직후인 4월3일 토론회의 주제를 ‘의회원을 설립하는 게 정치상에 제일 긴요하다’로 잡았다. 기관지인 ‘독립신문’도 30일치에서 “대한(대한제국)도 차차 일정 규모를 정부에 세워 혼잡하고 규칙 없는 일을 없애려면 불가불 의정원(의회)이 따로 있어야 한다”면서 여론전에 나섰다.
고종은 심각한 ‘정치적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고종을 가까이서 모시는 김영준 궁내부 시종원 시중은 3월28일 윤치호를 찾아가 “폐하께서 (독립협회 활동을) 매우 언짢아하신다”면서 “만약 내가 경무사(경찰청장)라면 독립협회에서 떠드는 자들을 모두 체포하고 목을 자를 것”이라고 위협했다. 독립협회는 굴하지 않고 7월3일 상소에서 “근래 유럽 여러 나라가 전제정치라고는 해도 상·하 의원을 설치해 언로를 넓게 열었다”고 주장했다. 고종은 “본분을 벗어난 망령된 언론은 옳지 않다”며 이를 내쳤다.
독립협회와 고종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유지되는 가운데 7월5일 초대 독립협회장이던 안경수의 ‘역모 사건’이 발각됐다. 러·일이 4월 ‘니시-로젠 의정서’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불간섭을 선언하자 안경수와 그 주변 인물들은 무능한 고종을 ‘양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민다. 가토 마스오 주조선 일본공사는 9월19일 오쿠마 시게노부 외무대신에게 보낸 전문에서 안경수 등은 “황제(고종)가 점점 국가의 대계에 뜻을 두지 않고 다시 간소배(奸小輩)들이 궁정에 드나들고 실정을 거듭”하자 “지금 백년장계를 정하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 아래 고종을 폐하고 순종을 옹립하려 시도했다고 적었다.
이 사건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평소 “성질이 잔인·혹독하고 박절하다”는 평을 받던 친러 수구파 대신인 조병식(1823~1907)이 독립협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직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윤치호가 7월20일 궁에 찾아가 독립협회 “회원들은 충군애국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긴다”고 설득하자 사태가 풀렸다. 고종은 21일 조병식을 면직했다.
독립협회가 “정계의 대세력으로 도약하는 전기”가 된 사건은 두달 뒤인 9월11일 찾아왔다. 불과 몇달 전까지 러시아어 ‘통역 권력’으로 대한제국의 국정을 농단하던 김홍륙이 고종을 암살하려던 ‘독차 사건’이 터진 것이다. 독립신문 10월14일치에 실린 대한제국의 판결 선고서를 보면, 김홍륙은 8월 말 “황제의 말을 잘못 통역했다”는 이유로 흑산도에 유배를 가게 되자 앙심을 품고, 궁궐에서 서양 요리를 담당하던 공홍식에게 아편 한 봉지를 주며 “진어하는 요리에 타서 올리라”고 지시했다. 공홍식은 궁궐 창고지기인 김종화를 ‘은 1000원’에 매수해 고종의 커피에 아편을 타게 했다. 이를 마신 고종과 순종이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졌다.
이 중대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갑오개혁을 통해 폐지했던 여러 악습이 되살아난다. 민영기 경무사는 죄인 심문 과정에서 잔인한 고문을 가해 다리를 부러뜨렸고, 신기선 법부대신 등은 노륙법(孥戮法·극악한 죄인의 처자를 연좌해 사형에 처하는 형벌)·연좌법, 죄인을 베어 죽이는 참형 등을 살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독립협회는 이를 대한제국이 ‘개혁의 길’에서 일탈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불길한 신호로 받아들였다. 9월25일 회의를 열어 “김홍륙이라도 법률에 의해서만 처벌돼야 한다”며 대대적인 반대 투쟁에 나서게 된다.
독립협회가 실력행사에 돌입한 것은 10월7일부터였다. 독립협회 회원 등 1만여명은 오전 8시 경운궁 인화문 앞에서 심순택(의정·‘의정부 관제’상 최고 직위)·윤용선(참정)·이재순(궁내부대신)·심상훈(군부대신)·민영기(탁지부대신)·신기선(법부대신)·이인우(법부협판) 등 수구파 ‘7대신’의 경질을 요구했다. 당황한 고종은 12일까지 이들을 모두 파면하고, 독립협회가 신임하는 박정양을 의정 서리에 임명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마지막 개혁’을 시도해 볼 만한 진용이 갖춰지게 된다.
희망적인 분위기 속에서 10월28일부터 11월2일까지 ‘관민공동회’가 열렸다. 종로 운종가 네거리 대회장엔 30×60피트(약 9×18m)짜리 대형 천막이 설치되고, 태극기가 걸렸다. 행사장 주변에 친 목책 안엔 약 4천명이 질서 있게 자리를 잡았다. 28일 오후 1시 집회를 시작해 윤치호를 대회장으로 선출했다. 29일 오후 2시에 시작한 이틀째 행사엔 박정양 등 고관들도 대거 참석했다. 이날 첫 연사는 박성춘이라는 이름의 백정이었다. 독립협회 간부였던 정교(1856~1925)가 쓴 ‘대한계년사’ 3권에서 발언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놈은 바로 대한(大韓)에서 가장 천한 사람이고 매우 무식합니다. 그러나 임금께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뜻은 대강 알고 있습니다. 이제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리하게 하는 방도는 관리와 백성이 마음을 합한 뒤에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삼가 원하건대, 관리와 백성이 마음을 합하여 우리 대황제(고종)의 훌륭한 덕에 보답하고 국운이 영원토록 무궁하게 합시다.”
이 회의에서 11개 결의안을 채택해 ‘헌의 6조’라 이름 붙은 6개 안을 고종에게 제출했다. 내용은 ①관리와 백성들이 힘을 합쳐 전제황권(專制皇權)을 굳건히 한다 ②광산·철도·석탄·산림 및 차관·차병(借兵)은 각부 대신들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해 서명·날인한다 ③세금은 모두 탁지부에서 관할한다 ④중대 범죄는 공판을 진행하고 피고가 자복한 뒤 형을 시행한다 ⑤칙임관은 대황제 폐하가 정부에 자문해 과반수의 찬성에 따라 임명한다 ⑥규정을 실제 시행한다 등이었다. 훗날 을사조약을 강요하는 이토 히로부미 앞에서 졸도하게 되는 한규설(1856~1930) 중추원 의장은 감격에 겨워 “금일의 관민협회는 (조선) 500년 초유의 일”이라며 “부강의 기초가 금일에 정해졌으니 국가를 위해 만세를 부르자”고 말했다. 고종은 30일 “정부로 하여금 조처하도록 하겠다”며 뜨뜻미지근한 수용 의사를 밝힌다.
윤치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형식적인 자문기구였던 중추원의 권한을 강화해 이를 ‘사실상의 의회’로 만들려 했다. 11월2일 개정된 ‘중추원 관제’(칙령 36호)에 따라 중추원은 △법률·칙령의 제·개정과 폐지 △의정부에서 임금에게 상주하는 모든 안건 △중추원에서 임시 건의하는 사항 등에 대한 심의 권한을 갖게 됐다. 의정부와 중추원 간에 의견이 다를 때는 “서로 협의해 타당 가결한 뒤 시행”하도록 해 사실상의 ‘거부권’도 행사할 수 있었다. 중추원 의관(50명)의 선발은 절반은 정부가 군주에게 추천하고, 나머지는 독립협회가 27살 이상인 사람 가운데 투표를 통해 뽑게 했다. 5일 독립관에서 첫 선거가 예정돼 있었다. 가토는 독립협회가 “내친김에 참정권을 얻으려” 한다고 분석해 본국에 전했다.
선거를 코앞에 둔 4일 밤이었다. 고종은 독립협회를 “밉게 보기를 뱀같이” 하고 있었다. 조병식·유기환·이기동 등 수구파 관료들이 독립협회가 국체를 공화정으로 바꾸려 한다며 마음을 흔들었다. 고종은 밤 9시께 윤치호를 불러 중추원 의관들을 어떻게 뽑을 것이냐고 거듭 물었다.
5일 새벽, 모든 게 물거품으로 변했다. 독립협회 지도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진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선거를 품위 있고 평화롭게 치르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던 윤치호는 가까스로 몸을 피했다. 분노를 이길 수 없었는지 5일치 영문 일기에 “이런 사람이 바로 왕이다! 아무리 감언이설로 사람들 속이는 비겁자라도 대한제국의 대황제보다 더 야비한 짓을 저지르진 않는다”고 적었다.
‘고종의 배신’에 분노한 민중들은 ‘대한제국판 촛불집회’라 할 수 있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끈질기게 맞섰다. ‘제국신문’ 편집장인 이승만과 배재학당 보조 교사 양홍묵이 이를 주도했다. 고종은 보부상으로 구성된 황국협회를 동원해 1차 진압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뒤 12월25일 무력을 동원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했다. 해가 바뀐 1899년 8월17일엔 ‘대한제국 국제’를 발표해 “대한민국의 정체는 만세토록 불변할 전제정치”라고 못을 박았다. 전제군주권을 둘러싼 개혁 세력과의 처절한 투쟁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이는 고종이었다.
이 과정을 쭉 지켜본 가토는 아오키 슈조 외무대신에게 보내는 1899년 5월17일치 전문에서 “만약 황제가 분연히 국정 쇄신의 성과를 거둘 결심과 용기를 일으켰다면 이것(독립협회의 활동)은 실로 한국의 큰 경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고종은 자기 살을 에어 내는 개혁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독립협회의 정치 개혁 시도가 결국 실패하며, 대한제국의 마지막 ‘희망의 불꽃’이 꺼지게 된다. 이제 망국으로 가는 수레바퀴가 본격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길윤형 | 논설위원. 대학에서 정치외교를 공부했다. 도쿄 특파원, 통일외교팀장, 국제부장으로 일하며 일제 시대사, 한-일 과거사,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질서의 변화 등을 둘러싼 기사들을 썼다. 지은 책으로는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다’ ‘아베는 누구인가’ ‘26일 동안의 광복’ ‘신냉전 한일전’ 등이 있고, ‘공생을 향하여’ ‘북일교섭 30년’ 등을 번역했다.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힘은 스스로를 냉정히 돌아볼 줄 아는 ‘자기 객관화 능력’이라고 믿는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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