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소사회의 길목에서 [세상읽기]

한겨레 2024. 11. 5.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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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세종로사거리에서 출근하는 시민들의 모습. 연합뉴스

조건준 | 아무나유니온 대표

청년들이 사회라는 단어를 싫어할까. 강연에서 이렇게 묻자 한 청년은 아니라고 했다. 대부분 사회가 무엇인가를 질문하면 답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뭘까. “모든 세대가 제대로 사회를 경험하지 못하니까, 사회를 느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설명하기 어려운 것 아닌가요.” 청년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혈연의 정으로 돌봄을 받고, 자라면서 친구와 우정을 나누고, 연인과 애정을 나눈다. 이런 관계도 사회의 일부지만, 사적인 관계들이다. 그렇다면 공적으로 체험하는 사회가 어떠하길래 사회에 대한 감각이 흐릿하고 개념은 모호할까.

공적 영역에서 가장 길게 체험하는 것은 직업의 세계다. 이것은 정(情)보다 돈이 더 강력하게 흐르는 경제의 세계다. 시장경제가 사회를 지탱할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지만 불평등, 능력주의, 각자도생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정치도 공적 영역에서 체험하는 것인데, 정치에 만족할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사회를 느끼지 못하는데 늘 느끼는 정치와 경제로부터의 부정적 체험이 ‘헬조선’이나 이번 생은 망했다는 ‘이생망’ 같은 말을 낳았다.

사회는 사이다. 사회라는 말의 뿌리인 라틴어 ‘소키에타스’는 사람들의 모임, 시민 결사체를 의미한다. 그런 사회는 개인과 국가 사이에 있다. 권력 앞에 개인은 무력하다. 뭉쳐야 권력에 맞서 발언할 수 있다. 사회는 기업과 개인 사이에도 있다. 돈 가진 기업 앞에 개인은 힘이 없다. 노동시민은 뭉쳐야 당하지 않는다. 상품과 이윤의 생산 장소인 공장과 직장에 만든 사회인 노조는 기업과 개인 사이에 있다. 사회는 권력이나 기업보다 가까운 ‘내 곁의 다정한 힘’인 것이다.

하지만 경제가 우리를 압도한다. 대부분은 먹고사니즘에 붙잡혀 살다가 친구와 만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사적인 영역에서 사회를 찔끔 체험한다. 산업사회, 정보통신사회, 디지털사회 등 흔히 쓰는 이름들에 사회는 가려져 그 자체로 다가오지 않는다.

압축성장으로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류의 고향 대한민국, 노벨 문학상을 받은 대한민국이 실패한 것이 있다. 사회의 질적 강화와 확장이다. 대통령이 바뀌어도 시민 서로의 연결이 탄탄하지 않으면 국가는 희망이 아니었다. 권리의 사각지대인 비정규직과 비임금노동자가 늘었고, 누가 대통령이든 자살률은 고공행진, 출산율은 곤두박질했다.

악순환이 왔다. 출산율을 1.5 이상으로 올리겠다는 정부 계획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고, 오히려 출산율이 줄어 고도성장 시대는 지나고 마이너스 성장이 다가올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설득력 있다. 디지털 전환으로 다시 성장할 것이라는 주장은 성장 중독증으로 보인다. 물론 성장할 산업도 있지만 그것은 일부다.

‘축소경제’로 인한 ‘축소사회’는 피할 수 없을까. 경제적 통계에 물든 우리는 사회마저 양적 통계로 판단한다. 경제가 곧 사회는 아니다. 경제 수축은 대공황이나 금융위기와 같은 세계적 차원, 외환위기와 같은 한국적 차원, 구조조정이라는 기업적 차원, 소득 감소로 인한 가족적 차원의 체험이이미 있었다. 그런 체험은 다시 성장으로 극복할 수도 있었지만, 다가오는 시대는 계속될 축소경제를 수용해야 한다.

두개의 길이 있다. 축소경제와 함께 축소사회로 가는 길과 축소경제에도 불구하고 적정사회를 만드는 길이다. 첫번째 길은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경쟁해온 습관에 더해 더 치열하게 다투며 ‘너 죽고 나 살자’는 길이다. 이미 다가온 것처럼 잔혹하게 사회를 파괴하는 전쟁으로 갈 수도 있다. 두번째의 길은 경제가 줄어도 우정과 애정이 흐르는 다정한 사회를 구축하며 ‘함께 살자’는 것이다.

장기 침체를 겪은 일본에서 ‘후퇴학’이 등장했는데, 축소경제에 조응하는 하나의 대응이다. 한국에서도 탈성장 논의가 늘고 있다. 한국은 물론 세계적 차원에서 새로운 사유의 필요를 드러내는 사례들이다.

사회가 강할 때, 기후위기와 수축경제의 아비규환을 넘어 적정사회로 나갈 수 있다. 국가와 개인 사이, 경제 권력과 개인 사이의 풍부한 사회를 만들 비전이 필요하다. 애정, 우정, 다정함이 흐르는 다양한 관계가 피어나게 할 흐름을 만들 때다. 이런 비전이 없으면 타오르던 촛불의 에너지가 정치로 소비된 경험을 반복할 뿐이다. 형편없는 정치가 못마땅하지만, 탄핵이나 퇴진에 희망을 느낄 수 없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회 없이 인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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