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 미쳐야 미친다

성행경 기자 2024. 11. 5.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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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행경 IT부장
한 가지만 몰입하는 괴짜가 혁신 만들어
'흑백요리사' 같은 과기 경연 프로도 기대
열정으로 성공·보상받는 '광인' 늘었으면
[서울경제]

넷플릭스 요리 예능 ‘흑백요리사 : 요리 계급 전쟁’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출연자는 ‘요리하는 돌아이(본명 윤남노)’였다. 처음에는 튀는 외모에 비속어를 거침없이 내뱉고 주의력 결핍 장애를 겪는 것처럼 산만한 그가 다소 거슬렸지만 경연이 계속될수록 무섭게 집중하면서 자신만만해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두부 지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면서 최종 승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가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열정과 패기는 시청자들에게 많은 감동과 영감을 줬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엇이든 자신이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도전하고 부단히 노력하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스스로도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하고 그저 조금 실력 있는 셰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요리에 ‘미친’ 그가 부단히 정진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요리사가 되기를 바란다.

윤 셰프를 포함해 프로그램에 출연한 많은 요리사는 저마다 스토리를 가진 이들이었다. 중국집 배달을 하다 요리에 입문한 이도 있었고 만화 가게에서 떡볶이를 만들다가 요리사가 된 이도 나왔다. 2010년대 들어 음식 프로그램이 늘어나면서 셰프가 되려는 아동·청소년이 적지 않지만 여느 분야와 마찬가지로 요리의 세계 역시 지난하고 지독한 경쟁이 벌어지는 분야다. 윤 셰프의 경우 작은 냉면집을 운영하는 어머니가 암 판정을 받으면서 생계 문제로 요리를 시작했다고 한다. 중고등학교 때 요리 자격증 다섯 개를 따고 대학 조리학과를 나온 후 유명 호텔 주방에서 혹독한 수련 시절을 보냈다. 이후 새로 개업한 레스토랑으로 옮겨 하루 18시간을 일하며 요리에 몰두했지만 업주의 부당한 지시를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온 뒤 한동안 일을 그만뒀다고 한다. 지금은 요식 업계 환경이 많이 바뀌고 요리사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지만 어떤 분야든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수준에 도달하려면 뼈를 깎는 고통과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는 것은 변함없다.

돌아이는 ‘멍청하거나 정신 줄을 놓은 짓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부정적인 어감이 강하지만 긍정적으로 보면 ‘엉뚱하고 독특한 사고를 하거나 우직하게 한 가지 일에 미쳐 몰입하는 사람’으로 규정할 수도 있겠다.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괴짜(Geek)’와 일맥상통한다. 세상은 모범·우등생들이 이끌고 유지하지만 괴짜들은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기도 한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그랬고,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도 마찬가지다. 독단적이고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그들의 괴짜 기질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 사회에 요리하는 돌아이처럼 괴짜가 많아졌으면 한다. 과학하는 돌아이와 코딩하는 괴짜를 자주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의사가 되기 위해 초등학생 때부터 의대 입시반을 다니고 학원에서 밤늦도록 선행학습을 하는 부류가 있다면 학교 과학 동아리에서 로봇을 만들고 과학관에서 주말과 휴일을 보내는 학생들도 있어야 한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와 지상파 및 종합 편성 방송에서 요리·음악 예능뿐 아니라 과학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보고 싶다.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가 전 국민의 ‘요리 멘토’가 됐듯 한국과학상과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을 받은 석학들이 심사위원이 돼 세계적인 과학자와 엔지니어를 꿈꾸는 대학생과 청소년들의 길라잡이가 되어줄 수는 없을까. 갈수록 심화하는 이공계 기피·이탈 현상을 극복하고 ‘과학 자본’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정부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과학기술계 전체가 지혜를 모으고 사회 각 분야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요리하는 돌아이는 완성된 요리사가 아니다. 그저 요리에 미친 셰프 중 하나일 뿐이다. 프로그램에 등장한 대부분의 출연자들도 마찬가지다. 한 분야에 빠져서 성취하기 위해 지독하게 노력하는 모습이 멋지고 존경스러워서 그들이 만든 요리를 맛보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그들의 식당이 밀려드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뉴스를 접하며 노력에 대한 응당한 대가라고 생각했다. 요리뿐 아니라 사회 여러 분야에서 중단 없는 열정과 광기 어린 집념으로 일가를 이루고 경제적 보상을 받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쳐야 미친다.

성행경 기자 saint@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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