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별한 시월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한겨레 2024. 11. 5.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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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 화면이 나오길래 빨래를 개면서 볼까 옷가지를 걷으러 베란다로 나가려던 찰나,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라는 앵커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되돌아와 화면을 보니, 이 소식은 잠시 후에 전해드리겠습니다, 하고는 다음 뉴스로 넘어갔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스마트폰을 켜 뉴스를 찾아보니 아무 소식도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한림원이 수상작을 발표한 바로 그 순간이었던 거다. 어느 누구도 이 소식을 전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그 상황. 나는 갑자기 책상 앞에 앉아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도파민인지 아드레날린인지 무언가 몸에서 뿜뿜 뿜어져 나와 약간 흥분 상태로 ‘와우, 한강 작가 노벨 문학상 수상!!!’이라고 제목을 쓰고 ‘소년이 온다’ 표지를 사진에 올렸다. 이 글과 함께.

소년이 온다

의욕이 급격히 사라진 상황에서 글을 씁니다. 아니요, 별 일이 있는 건 아니고,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읽은 탓입니다. 소설 속의 문장들이 명치 끝에 걸려 내려가지 않고, 등장인물들이 빙빙, 주위를 떠나지 않습니다. 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작가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예리하고도 사무치는 질문을 받고 나니 문득 제가 쓴 글, 혹은 지금 써야 하는 이 글로부터 조금쯤 달아나고 싶어집니다. 너무 좋은 글을 읽거나 너무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맥이 탁 풀리며 갑자기 세상이 낯설어지는 경험을 팀장님도 한 적이 있지요? 예술의 힘, 이란 그런 것이겠지요. 당연하던 것, 익숙한 것들이 순간 서먹해지며 눈 설어지는 것, 갈비를 뜯는 손이 조금은 수치스러워지는 것, 이 책을 쓰기 위해 한강은 그동안 소설을 썼구나, 책을 덮으며 생각했습니다. 이 책으로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받기를 바랍니다.

오래전 함께 책 작업을 하던 편집자에게 보냈던 메일이다. 아마 ‘소년이 온다’를 읽은 직후 쓴 글인 듯 하다. 잊고 있었는데 최근에 우연히 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했던 터라 바로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있었다. 그러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한강 작가의 수상 소식을 타전했다. 바로 핸드폰에 불이 나기 시작했다. 모두 흥분해서 자신들이 아는 소식을 공유하기 시작했다. 특히 글방 단체창은 열광 그 자체였다. 눈물이 난다, 손이 떨려서 자판을 제대로 칠 수가 없다, 모두 각자 샴페인을 따서 동시에 마시자, 내가 탄 것도 아닌데 가슴이 너무 벅차 숨이 잘 안 쉬어진다, 집에 ‘소년이 온다’ 책 있는 게 이렇게 안심되다니, 도서관에서 빌려 보고 바로 샀던 과거의 나 칭찬해 등등. 그 와중에 이슬아 작가한테도 카톡이 왔다.

하 진짜 너무 뻐렁쳐요!!!!!!

이슬아 작가가 글방에 다니던 시절, 나는 늘 느낌표는 누가 목에 칼을 들이대고 꼭 써야 되겠냐고 물어봤을 때 고개를 끄덕여야 하는 상황에만 쓰는 거라고 말하곤 했다. 그 느낌표가 여섯개다.

어딘, 지금 세계 최초로 한국 작가 때문에 다른 해외 출판사들이 현재 발등에 불 떨어졌어요. 한국 여자 작가 때문예요! 우리 출판계는 보통 반대로 했잖아요!!! 노벨 문학상 발표할 때 늘 우리 출판사들이 대기하고 기다렸는데 지금 해외 출판사가 난리났을 거라고요 ㅠㅠ 힝!!! 어딘, 저도 와인 딸게요. 그리고 어딘, 2년 전에 어딘이 점친 영상 캡처해서 올려도 되나요? 부끄러우시면 생략할게요.

아니요 세계 만방에 알려주세요. 음하하하하하. 아, 취하고 싶은 밤입니다.

저런 대화가 오갔지만 몹시 흥분 상태여서 나는 이슬아 작가가 무얼 올린다는 건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글방 단체창에 이슬아 작가가 올린 영상이 공유됐다. 세상에나, 네트워크알이(Re)에서 주최했던 강의에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향후 5년 안에 노벨 문학상 아마 받을 거 같습니다. 그럴 거 같습니다 그냥. 제가 촉이 조금 있거든요. 한강이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소년이 온다’로. 첫번째 노벨 문학상.

그러니까 나는 확신범이었다.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로 노벨 문학상을 받기를 열렬히 바랐던. 여행학교 로드스꼴라에서 광주 여행을 할 때 청소년들과 ‘소년이 온다’를 읽고 소설 속의 현장들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어쨌거나 영상이 공유된 이후 상황은 이상하게 전개되어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인사를 받게 되었다. 한의원 선생님께, 꽃집 사장님께, 스페인식당 대표님도 그 영상 봤어요, 라며 알은체를 해주셨다. 코미디 같은 상황이 민망하고 쑥스러워 아 네 네, 고개를 숙였지만 잊지 못할 시월의 어느 멋진 날들이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이틀 후에 어딘글방 주최로 김수현 작가의 북토크가 열렸다. 작가의 책을 읽은 독자들이 모여 책을 읽은 소감을 나누고 쓰는 일의 고단함을 공유하고 그럼에도 쓰고 싶은 마음을 살며시 드러내는 자리였다. 노벨 문학상 여파가 가라앉지 않은 터라 뒤풀이 자리의 열기도 뜨거웠다.

그런데 작가 자신이 세계에 많은 고통이 있고 우리는 좀 더 조용하게 있어야 한다, 라고 했는데 독자인 우리들이 이렇게 거하게 축하하고 그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누군가의 말에 나도 답했다.

음, 그래도 되지 않을까요? 작가는 작가의 태도와 입장이 있고 독자는 독자의 태도와 입장이 있다고 생각해요. 한강 작가의 수상 후 행보는 정말 ‘소년이 온다’를 쓴 작가스럽다고 생각했어요. 세계의 고통에 얼마나 극렬하게 섬세하게 반응하고 있는지, 이런 특별한 순간에조차 타인의 혹은 다른 존재의 고통을 감각하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죠. 그렇지만 독자인 나는 마음껏 축하하고 싶어요. 맘껏 기뻐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그 에너지로 다시 쓰고 읽고 폭력과 불의에 저항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소년이 온다’의 힘이 아닐까 싶어요. 누군가 그랬죠? 내 일도 아닌데 왜 그렇게 벅차고 감격스럽고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는지 모르겠다고. 음, 그건 바로 내 일이어서 그랬다고 생각해요. ‘소년이 온다’는 한강 작가의 책이지만 동시에 그 책을 읽은 독자의 책이기도 하거든요. 책, 은 작가의 것이면서 동시에 독자의 것이니까요. 어쩌면 노벨 문학상은 뜨겁게 아프게 ‘소년이 온다’를 쓴 작가에게, 그 책을 뜨겁게 아프게 읽은 독자에게 동시에 주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날 밤 우리는 새벽까지 쓰기와 읽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네트워크알이에서 내가 했던 강의의 마지막 소제목은 ‘쓰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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