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찬스’로 봉사활동 위조…영화 ‘보통의 가족’ 원작 소설 비교[선넘는 콘텐츠]
“미리 주는 거야. 나중에 대학 가서 꼭 봉사해야 해.”
작은 엄마 연경(김희애)은 고등학생 조카에게 ‘가짜’ 봉사활동 증명서를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사회공헌단체에서 증명서를 위조한 뒤 조카에게 생색낸 것이다.
물론 조카는 봉사활동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연경이 아프리카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비웃을 정도로 오만하다. 하지만 조카는 증명서를 대학 입시 때 활용하기 위해 연경에게 해맑게 웃으며 답한다. “감사합니다!”
● “아빠 병원에서 봉사활동”…한국 ‘입시 비리’ 저격한 영화
지난달 16일 개봉한 영화 ‘보통의 가족’은 한국 사회의 위선을 파고든 작품이다. 특히 자녀의 ‘입시’ 문제에선 범법행위도 저지르는 한국 부모의 왜곡된 모습에 대한 환멸이 가득하다.
겉으로 보기엔 등장인물들은 모범적이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연경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사회공헌단체에서 일하며 아프리카로 봉사활동도 다닌다. 아침이면 남편과 아들의 밥을 차린다. 늦은 밤엔 방에 딸린 작은 베란다에서 업무를 처리할 정도로 성실하다.
하지만 연경도 자녀 문제 앞에선 속절없이 무너진다. 고등학생 아들이 좋은 대학에 진학하기 어렵다는 선생 말을 듣자마자 남편이자 의사인 재규(장동건)에게 전화를 건다. 아들을 남편이 다니는 대학병원 봉사활동에 넣으라고 요구한 것이다. 망설이는 남편을 향해 아들이 대학엔 가야 하지 않겠냐며 밀어붙인다. 결국 아들이 엄마의 요구를 거절하지만, 입시에 목메는 한국 부모들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특히 영화 중반부 아들이 노숙자를 폭행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연경의 위선은 극에 달한다. 아들의 범행을 덮으려고 하는 것이다. 연경은 “우리 아이가 그랬을 리 없다”며 현실을 부정한다.
물론 영화는 누구나 처할법한 딜레마를 다뤘다. 하지만 최근 한국 사회에 ‘공정 논란’을 불러온 특정 사건들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메가폰을 잡은 허진호 감독은 올 9월 제작발표회에서 “우리 사회가 가진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영화에 들어갔다”며 “교육 문제, 빈부 문제, 상류층의 책임감 같은 문제를 담았다”고 했다. 허 감독은 “우리가 가진 신념, 도덕, 윤리가 어느 순간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인간의 양면성은 예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주제”라고도 했다.
● “입양아는 장식품”…유럽 ‘입양’ 문제 다룬 소설
이에 비해 네덜란드 소설가 헤르만 코흐가 2009년 출간한 원작 장편소설 ‘더 디너’(민음사)는 등장인물들의 위선을 ‘입양아’ 문제로 담았다. 유럽 내에서 논란이 진행 중인 입양 문제를 앞세워 유색 인종에 대한 왜곡된 시선, 친자식과 입양아에 대한 차별을 교묘하게 녹인 것이다.
예를 들어 소설에서 유력한 수상 유력 후보이자 정치인인 형 ‘세르게’는 입양아를 키우고 있다. 자신이 낳은 두 아이가 있지만, 따로 아프리카에서 아이를 입양한 것이다. 하지만 세르게의 동생 ‘파울’은 입양 부모들에 대해 이렇게 비관적으로 서술한다.
“물품 보관소나 동물보호센터에서 데려온 고양이 같은 것을 상상하면 된다. 만약 그 고양이가 소파 가죽을 물어뜯거나 집 안 곳곳에 오줌을 질질 흘리고 다니면 다시 돌려보내면 그만인 것이다.”
또 파울은 세르게를 의심한다. 세르게가 정치인으로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입양아를 키우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부르키나파소에서 데려온 새카만 아이를 친자식들과 차별 없이 사랑한 것은 훗날 세르게한테 커다란 명예를 안겨줬다. 기본적으로 입양은 세르게한테 와인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장식품이었다. 세르게 로만, 아프리카 출신의 아이를 입양한 정치가.”
사실 파울의 의심은 어느 정도 합리적인 면도 있다. 세르게는 남들 시선을 위해 살아가는 정치인이기 때문이다.
“세르게는 더 자주 가족사진을 찍었다. 이미지 관리를 하는데 상당한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 형님에게 “저기요”…가족 호칭 블랙 유머로 소화한 영화
영화가 한국 특유의 가족 간 호칭에 집중해 긴장감을 살린 점도 특징이다. 동서 간인 지수(수현)와 연경 사이에 나이 문제를 집어넣어 신경전을 극화시킨 것이다.
예를 들어 연경은 지수에게 ‘저기요’라는 호칭을 쓴다.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리지만, 관계상으론 손위인 지수를 차마 형님이라 부를 수 없어서다. 연경은 또박또박 존댓말을 쓰면서도 지수를 무시하기도 하다.
물론 연경이 젊고 아름다운 지수에게 열등감을 지닌 것도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남편과 함께 지수의 출신 집안이 보잘것없다는 점을 공격하는 뒷말하는 연경의 모습을 보다 보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다만 위선을 위트로 녹여낸 건 영화의 장점이다. 연경이 지수를 유치할 정도로 비꼬는 장면을 보다 보면 웃음이 나기도 한다. 배우 김희애는 지난달 7일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평소 허당이다. 연경은 직설적이고 이기적인 것 같지만 좋은 일을 할 땐 적극적으로 나서는 캐릭터”라고 했다.
물론 지수도 만만치 않다. 연경을 향해 “언니라고 불러도 되냐”면서 신경전을 벌인다. 자신의 젊음을 한껏 뽐내며 연경에 맞선다. 수현은 언론 인터뷰에서 “지수의 캐릭터는 뜬금없는 면이 있다. (해맑은) 반려견처럼 보인다”고 했다.
● “와인 메뉴판은 권력”…고급 식당 배경 주목한 소설
이에 비해 소설은 고급 식당이란 배경이 주는 독특한 분위기에 초점을 맞췄다. 애피타이저, 메인, 디저트 등 코스가 이어지는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위선적 행동을 벌이는 모습을 흥미롭게 그려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르게는 레스토랑 여직원들을 추파를 던진다. 식당 주인이 자신을 위해 테이블을 빼놓을 만큼 지위가 높다는 사실에 취해 선을 넘는 것이다.
“(세르게는) 이미 화는 다 풀려 버렸다는 듯 슬그머니 다정한 표정을 지었다. 봄눈 녹듯이 순식간에 말이다. 그럼 그렇지. 세르게가 방금 전까지 우리의 화젯거리였던 스칼렛 요한슨의 닮은 꼴을 놓칠 리가 있겠는가. 그는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며 자비로운 은총을 기다리는 ‘쭉쭉 빵빵한 몸매’의 여종업원을 쳐다봤다.”
또 세르게는 고급 와인에 대해 아는 체를 늘어놓으며 자신의 세를 과시한다.
“그는 레스토랑에서 와인 메뉴판을 제일 먼저 집어 들더니 알렌테호에서 생산된 포르투갈 와인의 ‘토질’에 대해 아는 체를 했다. 그건 일종의 권력 쟁취나 다름없었다. 그날부터 항상 와인 메뉴판은 당연하다는 듯이 세르게 앞에 놓였다.”
“세르게의 취미 생활 다음 단계는 창고를 와인 저장고로 개조하는 일이었다. 창고에 와인 병을 보관할 수 있는 선반들을 설치했다. 그는 그걸 ‘와인의 숙성’이라고 불렀다. 식사 때마다 자신이 마셔 본 와인에 대해 강연을 늘어놓았다.”
● “망각은 일찍 시작할수록 효과가 큰 법”…냉소적 시선 돋보여
영화가 주연 4명의 내면을 돌아가며 따라가지만, 소설은 파울의 시선에서만 진행된다는 점도 다른 점이다. 그 덕에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냉소적인 태도가 강렬히 느껴진다.
자녀들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난 뒤 파울은 이렇게 자문한다.
“어쩌면 어둠이 더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더 쉽게 진실을 털어놓을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다음에는? ‘진실’을 알고 난 다음에는 대체 어쩔 것인가?”
또 파울은 이 문제를 덮자고 결심한 뒤엔 이렇게 속삭인다. 비밀을 저편에 묻은 뒤 모른 채 현실을 찾아가는 우리 인간에 대한 통찰이 보인다.
“세상일이란 게 늘 그렇듯이 그 사건에 대한 기억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한테서 멀어질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우리가 잊어버려야 할 것은 바로 그 비밀이었다. 둘이서만 알고 있는 비밀. 망각은 일찍 시작할수록 효과가 큰 법이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뒤틀린 욕망, 고고한 척 살아가지만 제 이익 앞에선 한없이 나약한 인간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어디든 있다. 그래서일까. 소설은 전 세계에서 100만 부 이상 판매됐다. 또 한국 외에도 네덜란드, 이탈리아, 미국에서 영화화됐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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