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에게 영혼 판 늙은 파우스트의 이중적 고백 [전쟁과 문학]
히틀러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
나치 무기 생산과 공정 총괄 역할
종전 후 감옥서 20년 동안 글 써
자서전 「제3제국의 안쪽」 출간
중요한 역사 기록물 평가 있지만
“가장 두꺼운 자기변명” 비판도
히틀러의 건축가, 제3제국 최연소 장관…. 수많은 수식어를 갖고 있는 알베르트 슈페어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終戰 후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2000쪽이 넘는 회고록을 썼다. 이게 바로 영화 '작전명 발키리'의 소재가 된 「기억: 제3제국의 중심에서」이다. 평가는 그의 삶만큼 이중적이다. 한편에선 중요한 역사적 기록물이라고 말하지만, 다른 한쪽에선 가장 두꺼운 자기변명이라고 비판한다.
알베르트 슈페어(1905~1981년)는 나치 정권의 건축가이자 군수장관이었다. 그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제3제국 무기공장에서 전쟁포로를 비롯한 노예 노동자 수백만명을 동원한 책임을 인정했다. 많은 노동자가 일터에서 학대받고 죽임을 당했다. 슈페어는 그 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기 생산과 공정을 총괄한 것은 그였다. 슈페어는 딱 그만큼만 자신의 죄를 인정했다. 가혹 행위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죄를 부인하지 않은 점을 참작해 재판부는 슈페어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했다. 이 30대 건축가는 어떻게 제3제국 권력의 핵심부로 진입했는가. 왜 나치의 장관 중 유일하게 사형을 면했는가.
슈페어는 건축 회사를 운영하는 아버지 영향을 받아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뮌헨 대학을 거쳐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공대에서 건축을 공부하는 동안 슈페어는 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졸업 후 슈페어는 세계적인 건축가 테세노 교수의 전임 조교가 됐다.
만약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명민한 교수가 됐거나, 건축가로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청년 건축학도의 삶을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1930년 슈페어는 히틀러 연설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슈페어는 히틀러야말로 혼란에 빠진 독일을 이끌 지도자라고 확신하고 이듬해 나치당에 가입했다.
나치당 간부 카를 항케와 선전장관 괴벨스 눈에 들어 당 청사 개조 작업에 참여한 슈페어는 뛰어난 설계 능력을 발휘했다. 1933년에는 나치당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무대 연출을 맡았다. 나치의 천재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1902~2003년)의 카메라는 슈페어가 만든 무대를 환상적으로 포착했다.
전당대회 이후 슈페어는 나치의 공연 기획과 연출을 도맡았고, 독일 주요 도시들의 설계를 입안했다. 적절한 구획 분할과 배치, 상징을 담은 건축물의 조화, 잉여공간의 활용 등 슈페어가 진행한 도시 설계는 오늘날까지 교본으로 활용될 정도로 뛰어났다. 이 과정에서 슈페어는 '히틀러의 건축가'라는 별칭을 얻었다. 슈페어는 히틀러의 야망을 건축물로 구현했고, 한때 미술학도였던 히틀러는 그의 천재적인 설계 능력에 감복했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슈페어는 독일군 전체 군수업무를 담당하는 군수장관에 임명됐다. 37세에 불과한 슈페어는 제3제국 최연소 장관이자 핵심적인 권력자로 부상했다. 군수 분야에서도 그는 타고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슈페어는 중요한 군수시설들을 분산했고, 적절하게 인력을 배치해 생산 효율성을 높였다. 연합군의 맹폭에 큰 피해를 받으면서도 슈페어의 탁월한 수완으로 독일의 군수품 생산은 줄어들지 않았다. 서방언론과 영국 정보국조차 슈페어를 '나치의 최고 인재'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을 모의한 독일 장군들도 슈페어가 군수업무를 담당할 유일한 인물이라고 인정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슈페어는 모든 것을 파괴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어기고 산업 시설과 예술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허위 보고를 올렸다. 히틀러는 슈페어의 보고를 그대로 믿었고, 덕분에 무수한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947년 7월 18일 베를린 슈판다우 감옥에 수용된 슈페어는 1966년 9월 30일까지 20년의 형기를 채우고 석방됐다. 그는 슈판다우 감옥에서 20년 동안 쉬지 않고 글을 썼다. 일기, 편지, 자서전을 위한 토막글 등 그가 쓴 글은 2000장이 넘었다.
달력, 종이 상자, 화장지 등에 적은 슈페어의 글은 훗날 자서전 「제3제국의 안쪽(국내 출간명 「기억」)」으로 출간됐다. 이 책은 히틀러와 함께 생활하지 않았으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에피소드들이 숱하게 등장하고, 전쟁 중 독일 내부 사정을 보여주는 자료가 가득하다.
출간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오른 슈페어의 저서는 제3제국의 실상과 히틀러의 행적을 담은 중요한 역사 기록이 됐다. 히틀러 암살 작전의 정황을 다룬 '작전명 발키리(브라이언 싱어 감독·2008년)'와 베를린 공방전과 히틀러의 최후를 조명한 '몰락(올리버 히르슈비겔 감독·2004년)'은 모두 슈페어의 회고록에 기록된 사실을 토대로 제작된 영화다.
젊은 시절 슈페어는 히틀러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믿었다. 히틀러는 슈페어가 지닌 잠재력의 한계를 뛰어넘을 힘을 줬다. 유대인을 말살하고 세계를 정복하겠다는 히틀러의 입장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슈페어는 그 목적에 부합하는 건물을 설계했고 무기를 생산했다.
슈판다우 감옥에 근무하는 연합군 병사들과 소련 경비병들은 예외 없이 전쟁으로 가까운 친척이나 형제, 부모를 잃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슈페어에게 개인적인 원한을 품지 않았다.
광기 어린 시대를 살았기에 평범한 일상과 감정에 무지했던 그는 슈판다우 감옥에서 '평범한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비로소 따뜻한 인간애에 눈을 떴다. 1905년에 태어난 슈페어는 40세가 될 때까지 독일 역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두차례의 세계대전·경제대공황·나치집권기)를 살았고,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다가 61세의 노인이 돼 다시 세상에 나왔다.
슈페어는 자서전을 출간하면서 "과거를 기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에 경고하기 위해서 썼다"고 밝혔지만, 많은 사람은 2000쪽에 달하는 슈페어의 자서전을 "가장 두꺼운 자기변명"이라고 비판했다. 그들은 슈페어가 다른 전범들과 달리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나치 지도부의 '집단 책임'을 거론한 것도 교묘한 변명이며,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고 치밀한 계산 아래 히틀러를 지지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논란은 독일 안팎에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슈페어는 (연합국 검사들의 표현처럼) '선량한 나치'인가, 아니면 '1급 전범'인가. 회고록의 마지막에 슈페어는 이렇게 적고 있다. "기술 발전의 가능성에 눈이 먼 나는, 거기에 내 삶의 황금기를 바쳤다. 그러나 지금, 과학기술에 대한 나의 견해는 지극히 회의적이다."
슈페어는 슈판다우 감옥에서 자신이 걸었던 거리(3만1939㎞)까지 기록하면서 고독한 시간을 견뎠다. 끝없이 걸으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슈페어의 회고록은, 마치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던 '파우스트'의 슬픈 독백처럼 읽힌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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