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주주의 추락과 대통령 부부[시평]

2024. 11. 5.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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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4년 전 트럼프 대선 불복 사태
‘바나나 리퍼블릭’ 조롱 자초
한국과 미국, 양극화 동률 1위
희한한 문자·육성 잇달아 폭로
문제없다는 인식이 더 큰 문제
여당조차 속수무책인 요지경

미국의 대선 날인 오늘, 4년 전 대선이 생각난다. 2021년 1월 6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결과를 승복하지 않겠다고 주장했고, 이 말을 들은 지지자들은 미 의사당을 점거해 대선의 마지막 절차인 선거인단 투표지 개표를 가로막았다. 이 비극을 보고 케냐의 한 신문은 ‘지금 과연 어느 나라가 바나나 리퍼블릭(banana republic)이냐?’고 헤드라인을 뽑았다. 한마디로, 미국을 바나나나 팔아서 겨우 연명하는 나라도 아닌데 정치 수준이 형편없다고 조롱한 것이다. 줄곧 바나나 리퍼블릭이라고 미국의 괄시를 받아온 아프리카 국가가 어느덧 미국을 바나나 리퍼블릭이라고 비하할 정도로 미국의 민주주의는 무너졌다.

그해 10월 미국 여론조사회사 퓨리서치센터의 설문조사는 전 세계 17개 선진국 가운데 미국이 정치적 양극화와 사회 갈등의 강도가 가장 심각해 100점 만점에 90점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2022년 8월 한 외신에 따르면, 미국 국민의 절반 정도인 43%가 10년 안에 미국에서 내전이 발생할 것이라고 비관했다. 2023년 7월 미국 시카고대의 한 여론조사는 응답자의 10%만이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매우 또는 잘 작동한다’라고 답했는데, ‘전혀 또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대답은 무려 49%나 됐다.

이번 대선에서도 미국이 바나나 리퍼블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날 것 같지는 않다. 이미 지난 10월까지 제기된 대선 관련 소송이 4년 전의 3배가 훨씬 넘는다고 한다. 선거가 끝나기도 훨씬 전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선거 승패를 좌우하는 경합주 펜실베이니아에서 부정선거가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만약 선거에서 지면 4년 전과 같이 대선 결과에 불복할 것임을 시사했고, 응답자의 30%만이 트럼프가 선거에 져도 그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일 것이라고 답한 여론조사도 나왔다.

앞의 2021년 10월 퓨리서치센터의 설문조사에서 정치적 양극화와 사회 갈등의 심각성에 있어 미국과 동률 1위를 차지한 다른 국가는 다름 아닌 한국이다. 지금은 윤석열 대통령이 ‘명박사’라고 인정한 여론조사자 명태균 씨가 녹음한 ‘끝장’ 드라마가 계속 나오는 중이다. 명 씨의 목소리로 김건희 여사가 “아니 오빠, 명 선생님 그거 처리 안 했어? 명 선생님이 이렇게 아침에 놀라서 전화 오게 만드는 오빠가 대통령으로 자격이 있는 거야?” 하는 말이 나왔다. 윤 대통령은 “그건 김영선이 좀 해줘라”고 하는 공천 관련 대화도 매체마다 퍼 날랐다.

때마침 열린 국정감사에서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이 명 씨와 통화 내용에 대해 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 법적으로, 상식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내용”이라고 밝혔다. 검찰총장 출신 윤 대통령한테 ‘공정과 상식’이나 ‘공과 사의 구분’이 이렇게도 수준 이하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 대통령을 오빠라고 부르는 이가 대통령 자격을 걸고 넘어가는 희한한 광경이 노출됐는데 용산의 입장은 천하태평이다.

오히려 ‘오빠’가 대통령이 아니라 ‘친오빠’라고 해명했던 다른 녹음에 대한 것도 무색해졌다. 정말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대통령 목소리가 녹음으로 나오기 전부터 실시된 지난주 갤럽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처음으로 20% 밑으로 떨어졌을까.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취임 30개월여 만에 19%를 기록했는데, 대구·경북에서는 그보다 낮고 서울(22%)보다도 낮은 18%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나.

81회나 여론조사를 해주고 그에 기초한 보고서로 대선 당일까지 회의를 했다는데, 명 씨는 “오로지 대통령하고 사모님을 위해서 모든 걸 희생했어요. 그래야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를 받을 수 있는 거예요…. 내가 김건희한테, 윤석열이한테 돈 받은 거 있습니까?”라고 강조했다. 명 씨의 여론조사 회사 소속이었던 강혜경 전 보좌관은 명 씨가 “여론조사 비용이 3억7500만 원이라고 밝히면서 돈을 받아오겠다고 했는데, 돈은 안 받고 김 전 의원 공천을 받아왔다”고 주장했다. “김건희가 권력을 쥐고” 있다는 식의 명 씨 녹음과 발언은 계속 나올 것이고, 여당의 속수무책 상황도 이어질 것이다. 명 씨와 대통령 내외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끝없이 추락시키고 있다. 대한민국도 바나나 리퍼블릭이라 불릴까 봐 정말 창피하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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