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사주’ 베이조스, 워싱턴포스트를 먹칠하다
지난달 25일 저녁 6시21분(미국 동부표준시 기준). 워싱턴포스트 누리집에는 ‘민주주의는 어둠 속에서 죽는다’(Democracy Dies in Darkness)라는 제목의 만평이 게재됐습니다. 워싱턴포스트가 2017년부터 제호 바로 아래 새겨넣은 슬로건입니다. 직사각형 만평 프레임을 검은 붓으로 온통 덮어버린, 말 그대로 먹칠한 작품이었고, 부제에는 이런 설명이 쓰여 있었습니다.
“대통령 후보 지지를 하지 않은 워싱턴포스트에 대하여.”
약 6시간 전 워싱턴포스트는 윌리엄 루이스 편집인 겸 최고경영인 명의로 이번 선거에서는 대통령 후보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겠다고 공지했습니다. 36년 만의 일이었죠. 루이스는 이것이 앞으로 워싱턴포스트의 원칙이 될 것이며, 초심으로 돌아가는 일이라고도 했습니다. 대선을 열흘 앞두고 이루어진 기습적인 발표였습니다. 편집장이 사퇴했고, 나흘 만에 전체 유료 구독자의 약 10%(25만명)가 빠져나갔습니다. 위 만평 페이지에는 3658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워싱턴포스트는 부끄러운 줄 알라”는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신문사가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을 내지 않겠다고 밝히자, 미국 시민들이 입을 모아 민주주의의 장송곡을 떼창하고 있습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60번째 미국 대통령 선거 본 투표 개시까지 2시간을 남기고 워싱턴포스트를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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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루이스의 발표
미국 신문들은 선거를 앞두고 언론사 차원의 입장을 정리해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 사설(endorsement editorial)을 쓰는 전통이 있습니다. 1860년 시카고트리뷴이 에이브러햄 링컨을 지지한 일을 시작으로 관행이 되었고, 크고 작은 매체가 각자 사정에 맞게 수용하였습니다.
언론이 대놓고 선거 캠페인을 벌인다니 미친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이를 정당화하는 몇 가지 기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뉴스를 생산하는 편집국과 오피니언을 관장하는 편집위원회(논설위원실)가 엄격하게 분리된다는 점이고(지지 사설은 편집위원회에서 작성합니다), 둘째는 미국 언론이 지지 사설을 일종의 서비스이자 사회적 사명으로 여긴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 선 독자에게 제공하는 전문가 가이드라는 것이죠.
워싱턴포스트의 경우, 전통이 아주 길진 않습니다. 윌리엄 루이스 편집인이 ‘초심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은 1970년대 중반까지는 지지 선언을 하지 않는 쪽이 워싱턴포스트의 전통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기조는 1976년 대선을 기점으로 바뀌었는데, 루이스는 이를 “알만한 이유로” 그렇게 됐다고 표현합니다.
당시 대선은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자진 사퇴한 뒤 치러진 선거였고, 워싱턴포스트는 70년대 초반 닉슨 행정부의 치부를 가장 집요하게 공략했던 언론이었습니다. 미 국방부의 베트남전 관련 기밀문서인 펜타곤 페이퍼를 폭로했고, 워터게이트 사건 특종으로 닉슨 대통령에게 결정타를 날렸죠.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1976년 대선은 워싱턴포스트가 설계한 선거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때 지미 카터를 지지했고, 이후 줄곧 민주당 후보 지지 사설을 내왔습니다(1988년은 제외).
70년대 워싱턴포스트가 쌓아 올린 영광의 역사를 아는 독자들은 ‘그 이전의 본래 뿌리를 되찾을 것’이라는 루이스의 발표에서 위화감을 느낄 법합니다. 실제로 지난 1일 워싱턴포스트가 공개한 독자 편지에서 한 62살 구독자는 70년대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대통령 후보를 지지하지 않기로 한 결정에 배신감을 느낍니다. 이 결정이 몇 달 전에 내려졌다면, 이 정도로 비겁해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때 워싱턴포스트의 발행인이었던 캐서린 그레이엄은 배짱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과 회사에 큰 위험을 무릅쓰며 펜타곤 페이퍼를 공개하고 워터게이트를 추적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제프 베이조스의 해명
이 구독자의 반응은 여러모로 핵심을 꿰뚫고 있는데, 결정의 타이밍이 수상하다는 것이 첫 번째, 50년 전 워싱턴포스트와 지금 워싱턴포스트의 가장 큰 차이는 사주에 있다는 것이 두 번째입니다.
이 결정이 공지된 지난달 25일, 워싱턴포스트 보도국은 자사 편집위원회를 취재하여 당초 해리스를 지지하는 내용의 사설 초안이 작성됐으나 제프 베이조스가 개입하여 공표를 가로막았다고 보도했습니다. 베이조스는 아마존 창업자입니다. 포브스가 추산한 순 자산은 2062억달러(약 283조원)에 달하고, 2013년 경영난에 허덕이던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하였습니다. 즉, 억만장자 사주의 개입으로 유서 깊은 언론사의 저널리즘 전통이 훼손된 것 아니냐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죠.
베이조스는 결정 사흘 만인 지난달 28일 워싱턴포스트 오피니언 섹션을 통해 입장을 밝힙니다. ‘가혹한 진실: 국인들은 뉴스를 신뢰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기고문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미국인 대다수가 언론이 편향되어 있다고 믿으며, 언론에 대한 신뢰는 점점 하락하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의회보다 신뢰도가 낮다.
―대통령 지지 선언은 실제 선거의 판세를 바꾸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해당 언론이 정파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인식을 강화할 뿐이다. 지지 사설 같은 건 일절 내지 않았던 20세기 초중반 워싱턴포스트 발행인의 판단은 옳았다.
―나는 정치권 누구로부터도 어떤 대가를 약속 받은 사실이 없다. 결정 당일 블루 오리진(베이조스의 민간 우주개발 기업) 임원이 도널드 트럼프 캠프와 만났지만, 나는 회의 사실도 몰랐고 이는 이번 결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지난 11년간 사익을 위해 워싱턴포스트를 이용한 적이 있었나.
이어 베이조스는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같은 리버럴 매체가 소수 엘리트의 공론장으로 축소되어 가고 있으며, 그 사이 다수 미국인은 소셜미디어, 팟캐스트와 같은 검증되지 않은 소스에 의존하여 자신의 편견을 강화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현실 속에 유력 언론의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은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길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베이조스의 해명은 일견 타당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고, 실제로 지지 사설 전통이 시대착오적이라고 판단한 언론사가 점점 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 만으로는 ‘왜 하필 지금, 이런 방식으로?’라는 세간의 의문을 해소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도널드 트럼프’라는 특수한 인물에 대한 베이조스와 워싱턴포스트 기자·독자 사이 견해 차가 커 보입니다.
베이조스에게 트럼프란?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은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취약점에 대해 논의했습니다. 이들은 민주주의의 기본 규칙을 무시하고 체제를 위협하는 극단주의자가 등장했을 때, 이 세력을 단호하게 체제 밖으로 밀어내지 못하고 용인하면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트럼프는 지난 2020년 대선에서 개표 결과에 불복하고 급기야 지지자를 부추겨 국회의사당을 점거하도록 만든, 다시 말해 선거라는 기본 규칙을 부정하고 이를 전복하고자 폭력까지 동원한 ‘민주주의의 적’입니다. 미국 정치는 이미 한차례 트럼프라는 위험을 진단하는 데 실패했고, 이번 선거는 그 두번째 기회인 셈입니다. 이 국면에서 워싱턴포스트의 지지 사설 철회는 누군가에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극단주의 세력을 용인하는 신호로 읽힐 수도 있겠지요.
베이조스 입장에서는 그 극단주의가 현실이 될 미래를 무엇보다 큰 리스크라고 판단했을 법합니다. 해리스가 대통령이 된다 해도 본인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워싱턴포스트나 베이조스에게 보복을 할 가능성은 희박하겠으나, 트럼프는 다릅니다. 그는 지금도 대선 토론 중 사회자가 자신의 발언을 집중적으로 팩트체크했다는 이유로 “이런 방송사는 면허를 박탈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인이니까요. 아마, 워싱턴포스트보다 며칠 앞서 로스앤젤레스(LA)타임스의 해리스 지지 사설을 막아 세운 또 다른 억만장자 언론사 오너 패트릭 순시옹도 같은 사고실험을 했을 것입니다.
영국 가디언은 지난달 26일 독자들에게 돌린 이메일에서 두 언론사가 처한 상황을 전하면서 “민주주의에 있어 언론의 소유구조가 갖는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분명해졌다”라고 평했습니다(이 편지는 ‘오로지 독자 후원으로 운영되는 가디언을 지원해달라’는 당찬 호소로 끝납니다). 이들의 베팅이 어떤 후유증을 남길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말이죠.
미디어 잔혹사는?
유튜브 댓글부터 저녁 뉴스 날씨예보까지 미디어의 영토는 드넓습니다. 늘 논쟁이 끊이질 않는 영역이지요. 이곳에 익숙하고도 새로운 전선이 들어섰습니다. 언뜻 정치적 이전투구에 지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일상에 깊이 연루된, 자유에 관한 싸움이기도 합니다. 그 투쟁담을 중계해드립니다.
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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