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스토리]제일약품 사옥이 담보잡힌 사연

김윤화 2024. 11. 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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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트리스에 사옥 담보제공
화이자 제품 매출비중 48%
최근 신약개발사로 체질개선

제일약품의 지주회사인 제일파마홀딩스의 반기보고서를 보던 중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이 회사의 담보제공 현황에는 신한·국민·농협·기업은행 등 여러 금융기관들 사이에 낯선 이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비아트리스코리아'입니다.

비아트리스는 현재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제일약품의 본사 사옥을 담보로 잡고 있습니다. 이 사옥의 소유자가 제일파마홀딩스입니다. 담보가액은 총 400억원에 달합니다. 어떤 사연이 있길래 사옥까지 담보로 잡은 걸까 궁금했습니다.

비아트리스는 2020년 화이자의 자회사인 '업존'과 미국계 제약사 '마일란'이 합병해 탄생한 회사입니다. 주로 화이자의 특허만료 의약품을 판매하고 있는데요. 사연을 들어보니 해당 담보는 비아트리스가 제일약품으로부터 판매대금을 받지 못할 것을 대비해 설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2020년까지는 담보권자가 한국화이자제약이었습니다. 이를 비아트리스가 넘겨받은 것입니다.

제일파마홀딩스가 올해 상반기까지 연결기업에 제공한 담보현황./사진=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

글로벌 제약사는 국내 제약사와 공동 판매계약을 맺을 때 종종 담보를 요구합니다. 판매대금이 제때 지급되지 않을 때를 대비한 일종의 안전장치로 볼 수 있죠. 

그렇더라도 본사사옥을 담보로 잡은 건 드문 사례인데요. 비아트리스는 현재 삼일제약과도 공동 판매계약을 맺고 있지만 본사건물을 담보로 잡고 있지는 않습니다. 베링거인겔하임, 모더나 등 다른 글로벌 제약사와 공동 판매계약을 맺은 유한양행, 광동제약도 마찬가지입니다.

화이자 측은 과거에도 과도한 담보요구로 국내 의약품 도매업체와 여러 충돌을 빚은 이력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리한 담보요구를 제일약품이 수용하게 된 배경에는 화이자 제품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현재 제일약품은 화이자의 고지혈증 치료제 '리피토', 말초신경병성 치료제 '리리카', 신경병성통증 치료제 '뉴론틴' 등을 공동 판매하고 있는데요.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전체 의약품 매출에서 이들 품목이 차지하는 비중이 48%(1632억원)에 달합니다.

제일약품은 업계에서 화이자 제품판매에 힘입어 외형을 빠르게 키운 회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제일약품 대표를 맡아 2005년부터 19년째 회사를 이끌고 있는 성석제 대표가 한국화이자제약 출신입니다. 그는 재임 이후 화이자와 공동판매계약을 확대하는 등 협력관계를 돈독히 했죠.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죠. 화이자 측과 협력이 그렇습니다. 공동판매 제품은 원제조사의 제품을 들여와 판매하는 탓에 수익성이 낮은 한계가 있습니다. 실제 제일약품의 지난해 별도기준 매출액은 7000억원이 넘지만 영업이익은 65억원에 불과했습니다. 영업이익률이 1%에도 못 미쳤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화이자 측이 공동판매 계약을 중단하면 제일약품은 어떻게 될까요. 매출의 상당 부분이 날아가는 후폭풍에 시달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 비아트리스는 지난해 제일약품과 공동판매 중이던 '비아그라', '카투다', '디트루시톨' 등 비뇨기계 질환 치료제의 판권계약 연장을 중단한 적이 있습니다. 제일약품은 또다른 해외 제약사로부터 도입한 비뇨기계 신약('베오바정')으로 매출을 방어하려 했으나 충격을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지난해 제일약품의 매출은 전년대비 2.3%(168억원) 줄었습니다.

제일약품도 이런 리스크를 인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체 신약개발로 화이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2020년 신약개발 자회사 온코닉테라퓨틱스 설립을 꼽을 수 있습니다.

온코닉테라퓨틱스는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위식도 역류질환 치료제 '자큐보정'의 허가를 받는 성과를 냈습니다. 또 항암후보물질 'OCN-201'을 개발 중이며 연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코스닥 상장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오는 14~15일 일반공모에 나설 예정입니다.

제일약품 자체적으로도 이미 허가받은 약물의 안전성이나 유효성을 개선한 개량신약 개발을 늘리고 있습니다. 2018년 이후 현재까지 총 5개의 개량신약이 허가를 받았으며 추가적인 연구개발을 진행 중입니다. 개량신약은 출시 이후 일정 기간 동안 독점권리가 인정돼 높은 수익성을 기대할 수 있는 분야입니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해외 제약사의 제품을 판매하는 것은 단기적인 외형성장에 도움이 되나, 수익성이 낮고 계약 해지에 따라 지속적인 성장을 기대하기 힘들다"며 "유한양행을 비롯해 제일약품 등 국내 제약사들이 신약개발사로 체질 전환에 나선 것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화이자 측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제일약품의 노력이 성공하길 바랍니다. 회사의 상징과도 같은 사옥을 더는 담보로 내놓지 않아도 될 그날을 그려봅니다.

김윤화 (kyh94@bizwat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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