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동안 사람이 죽는다" 이스라엘 학살 보이콧 나선 한국작가들
[미니 인터뷰] 원혜진·정보라·천희란 작가 등 국내에서 276명 동참
"21세기 홀로코스트" "할 수 있는 최소한" "인종 학살 반대 당연"
[미디어오늘 김예리 기자]
국내 작가·출판인들이 전에 없는 규모로 이스라엘 집단학살 규탄 목소리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출판인 이스라엘 보이콧 선언'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벌이는 살상 행위에 “이는 집단학살”이라며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우리의 생활로 들어와 심장을 찌르고 있다”고 했다. 선언문은 “문화는 이러한 부정의를 정상화하는 과정의 필수 요소로 기능해왔다”며 “우리는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극심한 탄압에 연루되어 있거나 침묵으로 방관하는 이스라엘 문화 기관과 협력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전 세계 출판인 1000명이 지난달 28일 “이스라엘 출판기관을 통한 공모를 거부한다”며 선언문을 발표했다. 한국에선 번역문이 공유된 뒤 엿새 만에 276명이 이름을 보탰다. 국내 작가와 번역가, 편집자, 디자이너 등이 참여했고, 숫자는 늘고 있다. 국내와 전 세계에서 출판인들이 집단으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학살 반대 목소리를 낸 최대 규모 성명이다.
“이스라엘이 벌이는 인종청소는 가히 21세기 홀로코스트다.” 초기 서명자 6명 중 한 명이자 소설 <K의 장례>,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 등을 쓴 천희란 작가는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출판인들이 뜻을 모은 배경을 묻는 미디어오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더욱 충격인 건 그 폭력의 현장이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음에도 우리가 여전히 현실을 외면하거나 그에 무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무력한 감정을 느껴온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천 작가는 “한편으로 현재 레바논을 포함한 중동의 다른 지역까지 확대되고 있는 이 학살의 심각성을 생각할 때 현재의 관심도와 참여 속도가 충분하지는 않다고 느끼기도 한다”고 했다.
소설집 <저주토끼>, <그녀를 만나다> 등을 쓴 정보라 작가는 “(성명에 많은 이들이 참여한 것은) 인종학살에 다들 반대하는 뜻이라 본다. 당연한 얘기”라고 말했다. “가자지구엔 자체 군대가 없고, 이스라엘이 일방 공격을 하고 있다. 특히 어린이들이 굉장히 많이 죽고 다치는 상황은 아무도 원치 않는데도 1년 넘게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제 레바논도 공격하면서 협상이나 전투 중지 뜻을 내비치는 언급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국제사법재판소에 이스라엘을 인종학살 혐의로 제소했고, 여러 나라에서 학살을 막기 위한 나름의 노력들을 하고 있다. 한국에선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앞 규탄 집회가 열렸고, 나도 참가했다. 이번 성명도 그런 당연한 노력의 일환이다.”
팔레스타인 역사를 다룬 만화 <아! 팔레스타인>과 <필리스트>를 그리고 쓴 원혜진 작가는 선언에 동참한 이유로 “가자지구 학살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을 하고 있었다. 집회에 나가거나, 팔레스타인에 다녀와 쓴 책에 대한 강연이나 북토크 초청이 있으면 나가 이야기를 나눈다. 과거엔 부담스러워 모두 거절했었다”며 “이번에 전세계 출판인과 문인들이 이스라엘 보이콧 서명을 하고 있다고 해서 너무나 반가웠다”고 말했다.
원 작가는 “전 세계에서 서명으로 보이콧 운동이 있다는 걸 알기만 하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거라 생각한다”고 했다. “출판인들을 넘어 한국 사회 전체에서 이번 사태가 두 나라 간 분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일방적 민간인 학살이라는 점을 보편 정서로 공유하게 됐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정보라 작가는 이스라엘 집단학살과 관련한 출판인 선언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고 했다. “이스라엘이 지난해 10월7일 폭격을 시작한 뒤, 11월 전미도서상 시상식에 참가하러 뉴욕에 갔다. 당시 2022년 수상 최종후보 작가님이 올해 최종 후보자들에게 연락해 예술가의 의사표현을 하자고 제안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후보자 대부분이 동참했다. 수상한 저스틴 토레스 작가가 소감을 거의 밝히지 않고 자리를 양보했고, 알리야 빌랄 작가가 선언문을 읽었다. 이런 폭력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며 종교를 떠나 학살에 반대한다고 의사 표현을 했다.”
학살 반대 목소리를 낸 작가들을 상대로 백래시도 있다. 영미·유럽권에선 작가 행사가 취소되고 “유대인 차별”이라는 비난에 시달린다. 정 작가가 학살 반대를 선언한 전미도서상 시상식에선 후원을 취소한 기업이 나왔다.
한국에선 자기 이름을 걸고 사회 현안에 의견을 밝히는 작가들을 향해 '작품으로 말하라'는 압력도 있다. 원 작가는 이를 두고 “목소리를 내지 말라는 건 출판뿐 아니라 한국사회 모든 부문에 퍼져 있는 정서”라며 “그러나 작품은 물론, 작품을 통해서가 아니라도 한 인간으로 말도 안 되는 일에 대해 말 안 된다 말하고, 슬픈 일에 공감하고, 잘못됐다고 말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정보라 작가는 이 같은 요구가 “한가하다”고 일축했다.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도 사람이 죽고 있다. 작품이고 나발이고, 사람이 계속 죽고 있는데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니다.”
천희란 작가는 “작가라면, 작품을 통해 싸우는 것들과 삶에서 또한 싸우지 않기 어렵다”고 했다. 그는 “세계 시민사회 구성원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라며 “내가 작가이기에 내 목소리가 조금 더 힘과 주목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위해 쓰일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미주유럽 등지와 달리 한국에선 팔레스타인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이뤄지는 실질적인 탄압으로부터 자유로운 면이 있다”며 “그렇기에 조금 더 많은 문인들이 연대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3일(현지시간) 알자지라에 따르면 지난해 10월7일 이래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폭격 등으로 최소 4만3374명이 숨지고 10만2261명이 다쳤다. 사망자 중 최소 1만 7000여명은 영유아와 어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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